주로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이나 의례’를 의미하는 리추얼. 의식적인 반복과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형성되는 일상에 리추얼이 있다는 건 꽤 멋지다. 리추얼 혹은 단단한 루틴은 내게서 부러움을 자아내는 능력의 영역이다. 우스꽝스럽고, 어딘가 꺼림칙한 고백이지만 한때 내 꿈은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사는 것이었다. 반복과 지루함에 알레르기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집중력과 근성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날아오는 비난에 굴하지 않고 둘러댈 근사한 한마디가 필요해 쥐어 짜낸 꿈이었지만. 그런데 종종 무의식의 저편에서 여전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난 왜 이럴까? 난 왜 꾸준하고 일관되게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들과 다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간절히 나 자신에게 물으며 답을 찾고자 했던 의지를 느낌으로 기억한다. 이 절박한 자신과의 싸움을 누가 알랑가 몰라.
다년간 분투 끝에 찾은 건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제격인 건 없다고 본다. “That’s the way it is.”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처럼 나는 나인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결국 진리는 ‘오랜 시간 찾아 헤맨 후 겨우 발견하지만 제대로 김새는 것’ 아닐는지. 행복도 불행도 나만의 언어로 정의할 때 더 선명하다.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유쾌하지 만은 않은 여정을 지나야 하지만서도. 그리하여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라는 사적이고 내밀한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나 싶어 금세 변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시간의 힘을 믿어 보기로 했고, 더 솔직하게는 당분간 잊고 살고 싶었다. 이럴 때 일 만한 게 없겠다 싶었는데 내면의 목소리를 누군가 들었나? 업무가 파도처럼 몰려왔고, 일의 순기능-개인사가 심란할 때 가장 달콤함-을 제대로 체감했다.
일에서 감도 잡고 자리도 잡아갈 때쯤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비행기를 놓치는 화려한 오프닝을 연출했고, 계좌에 돈이 쌓이는 기쁨은 외면하면서 말이다. 다시 시작한 여행은 점점 내게 안식처, 도피처 혹은 돌파구가 되었다.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채로 마음껏 생각에 잠기는 특권을 누렸다. 소화시키기 어려운 생각은 글로 옮겨 보았고,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건넸다. 바지런히 도시를 걷고 누비는 가운데 망중한도 즐겼다. 파리의 16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중 오래전 들었던 설교 내용 한 조각이 생각났다. “사방이 막혀있다 싶을 땐 위를 올려다보세요.” 고난을 피할 길이 없으니 신을 의지해보라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내게는 여행이 바로 위를 올려다보는 거구나 싶었다. 여행을 떠나는 그곳이 어디든 신은 거기 계실 테니.
삶에 근사한 리추얼이 생겼다. 때가 되면 여행을 떠나는 것. 여행하기에 좋은 때는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 내가 떠나는 그때가 바로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다. 언제든 어디서든 ‘여행하는 지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하다 보니 믿게 됐고 믿다 보니 여행의 디폴트 정서가 된 것. 삶 속에 여행 속에 리추얼을 쌓아 가는 건 마치 항공사 마일리지 적립 같더라. 이윽고 쌓인 마일리지로 타이베이 항공권을 사고는 좋아 어쩔 줄 몰랐던 때가 떠오른다. 세월과 돈으로 마땅히 얻어낸 것임에도 얼마나 귀하던지요. 그런데 돌아보면 단지 숫자만 쌓인 게 아니었다. 마일리지와 함께 경험과 행복, 자유와 여유, 즐거움과 만족 그리고 호기심과 모험심까지 함께 쌓인 것이다. 여행에 동반되는 이 감정의 꾸러미를 ‘정서 마일리지’로 불러보는 건 어떨까. 기회가 될 때마자 적립하자, 정서 마일리지.
여행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 없이 그저 방랑하고 유랑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떠나자마자 ‘최상의 나’를 유지하기 위해 입었던 페르소나와 정체성이 유유히 스러지더라. 그러고는 날것의 자아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날것에서는 자유와 가능성의 향기가 난다. 날것은 예쁘기보단 차라리 장엄하다. 나를 날 것으로 온전히 마주하는 건 고통스러운 천국이었는데, 흔쾌히 감당하고픈 모순이었다. 뿌듯하지만 당혹스럽고, 유쾌하지만 짐짓 수치스러운, 통쾌하지만 쓸쓸한 이 음과 양의 충돌이 정녕 내 안에서 일어났단 말인가. 생각과 감정이 한 데 섞여 잠시간 소용돌이를 일으키더니 이어서 영혼을 정화시키기를 반복했다. 이른바 온탕 냉탕 번갈아 드나들기. 건강에 좋을 거라 믿어본다. 갑옷을 발가벗기고 나면 과연 내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 염려했던 건 기우였다. 모래에 섞인 돌을 체로 걸러내듯, 여행은 역기능적 사고 필터링과 노이즈 캔슬링에 최적이다.
여행이라는 멋진 인생 속 리추얼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삶의 크고 작은 단위의 일상에도, 여행에도 리추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미하지만 미묘한 이 변화는 급기야 하나의 소원으로 이어졌으니.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여행인지 일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만나길 바라는 소원. 그리고 그 순간을 부디 의식하고 감각하길 바라는 염원. 여행의 말미가 되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영원히 여행할 수는 없을 텐데 과연 나는 언제 어디에서 마지막 여행을 할까’라는 생각. 몇몇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지막 여행의 순간, 나는 혼자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일까?’. ‘마지막 여행임을 직감할까? 여행을 졸업하는 순간, 나의 마지막 소회는 무엇일까?’. 마침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로 듣고 있는데 마음에 작은 소란이 일어난다. 가슴이 뜨거우면서도 묵직해지는 질문을 웅장한 멜로디와 함께 하려니 뭉클하다.
여행을 할수록, 여행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쌓일수록, 세월도 쌓인다. 수많은 생각의 흔적들이 겹겹이 포개어지고, 아름다운 추억도 차곡차곡 쌓인다. 여행의 효력도 누적된다. 말인즉슨,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되는 일상의 나날에 여행이 미치는 영향과 효과의 유효기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것. 저축이 이자로 복리의 마법을 부리듯 여행의 축적은 경험과 감각을 적립한다. 어디 이것뿐이랴. 여행의 리추얼도 쌓인다. 주로 낯선 환경과 새로운 분위기를 기대하며 떠나곤 했던 여행에서 리추얼이 건네준 기쁨을 맛본 건 가히 축복이었다. 이 느낌을 묘사해 보자니 유명 식당들의 단골 광고 문구가 떠오른다.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습니다’. 입 꼬리 한쪽 슬쩍 올리며 싱겁게 웃어넘겼던 내용인데 음미해 볼수록 예사롭지 않다. 내 여행도 이제는 리추얼 없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렇게 나도, 내 여행도 진화하고 있다.
여행의 여정에서 소중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날은 없다. 다만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첫걸음이 내겐 매우 중요하다. 첫걸음은 동네 구경, 맛있는 식사 혹은 술 한잔일 때도 있고, 욕조에 몸을 담가 피로를 푸는 쉼일 때도 있다. 물론, 순서대로 모두 가능하다. 여행자의 아드레날린이란. 여행에서 리추얼이 건네준 기쁨을 선명히 느끼기 시작한 건 두 번째 빈 여행에서였다. 이전 해에 첫 저녁 식사를 했던 어여쁜 로컬 식당을 다시 찾아간 것이다. 왜인지 정감이 뚝뚝 묻어나는 이름을 가진 곳 ‘마리엔 호프’. 로컬 사람들이 올망졸망 모여 분명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는데도 신기하게 조용한 곳이다. 빳빳하게 다려진 새하얀 식탁보 위엔 늘 장미 한 송이가 투명한 화병에 꽂혀 있다. 주문을 마치면 서너 종류의 빵을 바구니에 담아 하얀 헝겊으로 덮어 가져다준다. 순백의 이불을 덮고 있는 따스한 빵을 한 입 베어 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로컬 맥주와 와인 그리고 투박한 비주얼의 로컬 음식은 맛과 향이 훌륭하다. 푸짐한 양이 정신을 풍요롭게 채워주고, 매끄러운 서비스에 마음이 간질거린다.
첫 선택은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 타펠슈피츠와 굴라쉬였다. 집밥 느낌이 잔뜩 묻어 있는, 다정한 맛이었다. 다시 찾았을 땐 그리워했던 굴라쉬를 우선 찜한 뒤 추천을 받아 소고기 감자요리와 그린 샐러드를 주문했다. 아, 물론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고, 이번엔 두 잔이었다. 맛있는 추억 위에 더 맛있는 추억을 쌓았다. 여행이 이미 완성된 듯한 기분이 들면서 단전에서부터 만족감이 차올랐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좋은 기분을 항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여행의 첫걸음으로 마리엔호프를 다시 찾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과연 눈부시게 빛을 발한 노력 덕분에 빈과의 재회가 더 아름다울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며 우리 테이블을 맡아주신 분에게 몇 마디 건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라고, 너무 맛있노라고, 또 오겠노라고. 그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리추얼을 다시 찾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끝이 없을 줄 알았던 코로나19 팬데믹이 종식되면서 하늘길이 다시 열렸고, 지체 없이 나의 도시 빈으로 돌아갔다. 돌아갔다니… 이방인이자 여행자가 할 말은 아닌 듯하지만 분명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짙게 젖어든 즈음 호텔에서 나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빈의 향기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싶었다. 빈의 거리를 걷고 있단 게 감동적인 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30분쯤 걸었을까 짙은 녹색 간판과 반짝 거리는 미니 전구 넝쿨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설렘과 떨림이 교차했다. 마리엔호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미 몇 장이나 갖고 있지만 남다른 감회로 사진을 찍었다. 3년 전 앉았던 창가 자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었지만 창밖으로 따스한 빛과 온기가 새어 나왔다. 감격적인 세 번째 만남이 시작됐다.
모든 게 그대로인 게 이토록 고마울 일인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팬데믹이 혹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예전 그대로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화기애애한 공기, 은은히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목소리, 맛있는 음식 냄새 그리고 일하는 분들의 날렵하고도 우아한 움직임과 환한 미소까지. 분명 현실인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날의 추억을 떠올릴 때면 늘 영화 <카페 벨에포크>가 생각난다. 아내에게 별거 통보를 받은 주인공 빅토르는 고객 맞춤형 시간 여행 설계 서비스를 통해 과거의 ‘좋은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모든 게 철저히 설계된 세트장에서의 재현인 줄 알면서도 아내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순간에 몰입해 헤어 나올 수 없던 빅토르 이야기. 다시 만난 마리엔호프의 풍경은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설계하고 준비해 둔 ‘벨에포크’ 아닌가 싶었다. 황혼기 무렵 누군가 좋은 시절을 묻는 다면 모든 화려한 후보를 제쳐두고 마리엔호프 리추얼 스토리를 들려주지 않을까.
세 번째 만남에서도 굴라쉬와 소고기 감자요리를 먹었다. 가든 샐러드 대신 감자 수프를, 화이트와인 대신 레드 와인을 곁들였지만.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선생은 말했다. “리추얼의 목적은 ‘기억을 통한 의미구성’이다.” 다시 만난 빈 그리고 마리엔호프로 향하는 리추얼은 어느새 여행의 의미가 되었다. ‘여행이란 내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하나의 답이 되었다. 여행은 좋은 순간을 만나는 것이고, 여행을 통해 켜켜이 쌓이는 좋은 순간들은 좋은 시절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은 하고 있을 때보다 훗날 추억할 때 더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돌아보며 좋은 순간을 만들어준 리추얼에 의미와 이름을 붙여줄 수 있으니 말이다. 빈은 ‘나만의 도시’가 되었고, 마리엔호프는 ‘여행의 시작’이 되었다. 이제 나는 나만의 도시 빈의 안위를 걱정하고, 매년 마리엔호프 홈페이지에 접속해 시즌 메뉴와 새로운 소식을 찾아보곤 한다. 여행 중에 있지 않은 날들에도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