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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Oct 26. 2024

어떤 세계를 향한 동경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만의 세계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삶, 다른 세계를 동경하곤 했다. 미지의 세계, 머나먼 타국의 세상 그리고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공상에 잠기는 게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선 바쁜 일과 삶에 치이며 차라리 명상이 필요한 날들을 보냈다. 그럼에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공상에 빠진다는 말들이 많은데 과연 나도 그런 사람인가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런데 고민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여행길에 나섰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지양하고 싶었지만, 돌아보니 지난 20여 년 간의 여행이 명백히 그런 무늬를 띠었다. 안 그런 척했지만 어딘가에 ‘딱 맞는’ 나를 찾고 싶었던 거다. 어디에서도 완전한 소속감이나 안정감을 갖지 못한 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는 나와 딱 맞는 곳이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떠났다. 


실은 나 자신을 꽤 좋아하는 나인데 내색하는 게 어렵고 불편했다. 타인들로부터 받는 ’ 다르다’는 시선과 판단은 꽤 오랜 시간 ‘틀리다’라는 의미였다. 조금 다른 생각과 다른 표현을 하는 것뿐인데 환영받지 못한 세월이 길었다.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달까. 원할 때에는 드러나지 못했고, 원하지 않을 때 주로 노출됐다. 점점 내 삶의 반경에서 숨이 막혀왔고 일찌감치 ‘완벽한 타인’이 되길 갈망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모순과 양면성 그리고 연약함과 강렬함이 자주 충돌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바로 어쩌면 예술감이 폭발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어 아쉽다. 무언가에 깊이 침잠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공상에 빠져 살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떤 갈등과 결심도 나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지만 친구처럼 늘 함께했던 그 ‘공상’이 내 등을 떠밀어 주었던 셈이다. 떠나보라고, 떠나본 다음 또다시 공상에 빠져도 좋다고.


저질러본 잘못은 많지만 저질러본 큰일은 없었던 삶에 ‘여행’은 오아시스이자 단비였다. 원할 때마다 철저히 이방인이 될 수 있었고, 외로움과 고독 사이의 묘한 감정에 자발적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아름다움에 취해 비틀거릴 때도,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할 때도, 감성과 감동에 젖어  정신 못 차릴 때도 잊지 않았던 게 있다. ‘어딘가에 분명히 나만의 세계가 존재할 거야’라는 기대와 믿음이었다. 나만의 세계는 가까운 데서 찾으면 되지 않느냐는 가족들과 주변의 반문이 있을 때마다 속으론 날이 섰지만 얼버무리며 넘겼다. 내 은밀한 욕망과 꿈이 공감받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조금 더 어릴 적엔 답답함과 상처로 보낸 외로운 날들이었지만 나이 들고나서야 그건 숙명이었음을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한 시절이 있어야 더 절실히 떠났을 테니 말이다. 스스로 떠나본 자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독립의 맛은 궁극의 달콤함이었다.


여행 속에서 성장하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어렵고 불편한,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의 모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말이다. 캐리어를 끌고 도시로만 향하는 ‘도시여행자’였지만 그곳에도 모든 게 있었다. 오랜 역사와 문화, 찬란히 빛나는 예술, 무관심하고 또 다정한 사람들, 미식과 술, 아름다운 디자인과 황홀한 음악까지. 여행하는 날들은 내게 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혼자이고 고독할 땐 있는 그대로 행복했고, 함께일 때는 부대낌과 갈등의 미학이 있었다. 고독은 다름 아닌 ‘사람 냄새’였고, 갈등은 다름 아닌 ‘성장’의 증거였다. 여행에서 마주한 생각과 감정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끄적이지 않을 수 없었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한 나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나였다. 무엇이든 할 자유와 하지 않을 자유 가운데서 점점 행복해졌다.


여행에서 만나는 '동경해 마지않던 세계’는 단일 세계가 아니었다. 다양한 빛깔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변화하고 있었고 진화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동경하던 다른 세계가 과연 어디인지를 묻는 것을 멈추게 됐다. 대신 내가 향하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바로 동경하던 다른 세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세계라는 것이 마음가짐이고, 관점이고, 또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달까. 깨닫기까지의 여정엔 낯선 환경과 낯선 생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행만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탈출’이 아닌 ‘탐험과 모험’이었다. 수동적으로 ‘벗어났었던’ 시기에서 적극적으로 ‘떠나고 돌아오는’ 시기가 펼쳐졌다. 지배적인 감정이었던 해방감의 자리에 ‘호기심’과 ‘사랑’을 채웠다. 자연스레 ‘나를 위한 여행을 디자인하는’ 감각과 즐거움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내밀하고도 깊은 탐닉과 열망 그리고 환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여행자에게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여행자를 ‘광명을 나르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하노라니 흥미진진하다. 여행하는 우리들은 ‘광명을 나르고 있다는’ 것인데 너무 근사하다. 당시 당연히 여행 이야기를 공유받기를 바라는 자들이 많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행 문학’이 태동했다. 어떤 학자는 여행기를 ‘상상적 지리학(imaginative geography)’이라 칭했다고 하는데 정말 근사하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보고 듣고 음미하며 우리가 하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상상’ 아닌가. 상상은 여행 중보다는 여행을 준비하는 여정 속에서 폭발한다. 원하는 곳 어디로든 나를 데려다 놓고는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것들과 나 사이의 상호작용을 한껏 그려보게 되니 말이다. 


여행은 여행 자체로서의 즐거움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내 여행에 핵심 키워드들이 탄생했고 여행의 이유이자 동력이 됐다. ‘자유와 독립’, ‘감각과 감식안’, ‘호텔’, ‘오래된 것을 향한 애호’, ‘미식’, ‘음악과 미술’, ‘언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다. 할 수 있는 한 늘 머나먼 곳으로 떠나곤 했지만, 점점 가까운 곳들의 매력에도 심취하고 있다. 도시의 매력이란 끝이 없다. 양파처럼 한 겹 한 겹 벗겨내도 끝없이 새로운 매력이 터져 나오는 곳이다. 길 위의 철학이라는 말이 있듯 도시 속에는 철학과 예술이 있다. 도시의 길 위에서 벼린 생각과 취향은 삶의 핵심이 되었다. 차곡차곡 쌓인 감상은 표현과 사고에 지평을 넓혀주었고, 원 없이 뱉어냈던 감탄과 경이감은 맑은 정서를 빚어 주었다. 감동하는 주기의 간격은 좁아지고, 횟수는 늘어나는 삶이야말로 어떤 변화 속에서도 내 멋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전략이라는 걸 깨달았다. 


종이 지도에만 의지해 본 뉴욕 여행과 유럽 여행은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길을 잃었고, 원하는 대로만 다닐 수 없었던 데다가 날마다 새로움을 마주했다. 책과 지도만 들고 상상과 공상에 기대며 도시를 거닐고 노닐던 그때의 그 ‘감각’과 ‘희열’은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날들이었다. 도시는 영감의 원천들로 가득하지만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바로 ‘호텔’이다. 도시의 축소판이자 지역사회의 생기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한 공간. 집요하게 몰입해서 찾아낸, 내 취향과 호기심을 잔뜩 충족시켜 주는 호텔을 만나면 여행은 그 순간부터 이미 성공이다. 그 도시만이 가진 무언가를 호텔이라는 공간을 통해 발견할 때, 그 도시에만 존재하는 호텔을 만날 때의 희열은 여행을 완성시킨다고나 할까. 공간과 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즐거움에 큰 몫을 한다는 걸 꼭 기억해 보시라. 


여행 속에서 한없이 부려본 느림은 사치 중의 사치였다. 여행 속에서도 ‘휴가’를 허해보고, 날마다 ‘낭만’을 찾아 나섰던 건 가장 잘한 일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집중해 본 고밀도 고강도의 시간이었고, 나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 집착해 볼수록 여행에 나다움과 평온이 찾아들었다. 모든 감각을 일제히 깨워 도시와 교감하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외로움에 사무쳐도 보고 감동에 전율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식과 예술을 탐닉하며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떴고, 오래된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심미안을 충전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고, 답할 수 있어 행복하다가도 답할 수 없어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뜻밖의 상황을 맞닥뜨리며 분노하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마저 소중했다. 내게서 사랑과 온정을, 호기심과 열정을, 자신감과 결단력을, 활력과 유연함을 발견했다. 이 모든 것들의 반대 격인 것들도 날 것으로 마주했다. 징글징글하면서도 짜릿했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즐거웠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만의 세계를 찾았는지 묻는다면 ‘아니요’다. 그런데 그 세계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을 과분하게 얻었다. 남는 장사다. 여전히 그 여정의 길 위에 있고, 여전히 떠나는 나를 애정하고 응원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위해, 나에게 집중하며, 나만을 위한 여행을 디자인한 지난 날들 속에서 만난 ‘고유한 나’는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 투성인 것과는 상관없다. 우리 모두는 ‘다르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지, 그리고 얼마나 다행인지를 이제는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그랜드투어’를 디자인하는 시간과 결심이 없었다면 받을 수 없던 선물이었다. 꽤 오랫동안 ‘‘왜 여행하는가?’라는 질문이 답할 수 없기에 더 찬란한 것이라 생각했다. 물었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고, 점점 답할 수 있는 지점으로 다가가고 있다. 동경했던 어떤 세계는 바로 ‘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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