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에인트호번(Eindhoven)
내 여행 사전에 ‘의지’는 있지만 ‘의존’은 없었다. 오랫동안 자발적 의지와 적극적인 디자인으로만 채웠던 여행의 역사에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 변화는 암스테르담에서의 5일을 뒤로하고 친구 미현 부부에게 픽업당한 직후로 시작됐다. 도로 위에서 창밖 네덜란드 풍경을 감상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여행이었다. 미리 공부 한 글자 안 하고 향한 유트렉(Utrecht)과 뉘넨(Nuenen)과 에인트호번(Eindhoven)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친구 미현의 다정한 가이드에 ‘의존’하는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친구의 가이드는 때론 무심히, 때론 섬세히 도시와 풍경을 탐닉할 수 있는 ‘자유’를 안겨주었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경험이었다. 여행 속 자유란 오직 내 의지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고나 할까.
취향과 기대와 속도의 3박자를 배려하며 맞춘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도 가능했다. 물론 모든 공은 친구에게 있다. 다만, 생전 거의 처음 가이드에 따르는 편에 서보면서 어떤 태도와 마음을 겸비할 때 더 충만하고 즐거울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늘 내 리드와 선택을 따르며 맞춰주는 연인의 생각과 마음도 그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쉽지 않은 일이고 에너지도 제법 드는 일이지만 ‘사랑과 신뢰‘에서 비롯되는 마음가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랑과 신뢰에 기반한 여행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지루하지 않다. 색다른 자유함이 동반된다. 관심과 애정이 더 뾰족해질수록 ‘취향’이 벼려지듯, 상대방의 취향과 선호를 연구하고 배려한 가이드는 ‘관계의 깊이’를 좌우할 만큼의 힘을 지녔더라. 가이드를 건네는 쪽도 받는 쪽도 모두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여행을 경험했다는 건 가히 축복이었다.
에인트호번은 두 가지 키워드로 추억한다. ‘호텔’ 그리고 ‘녹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어려우리만치 호텔과 녹음이 짙은 자연 덕분에 3일 동안 촘촘히 행복했다. 호텔 핏 헤인 에이크는 각별하고 특별하다. 친구 미현의 추천 덕분이기도 하고, 호텔 전체가 예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호텔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환경 실천적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인 핏 헤인 에이크와 동명이다. 그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디자인과 작품 세계의 철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공사 현장에 버려진 목재 조각과 철 파이프, 방수포 등 작품에 사용하는 소재가 워낙 다양하고, 재활용과 재해석으로 공간과 작품을 탄생시켜서일까. 디자인과 그에 감도는 분위기가 제법 낯설지만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로 아름답다. 마주하는 순간 그 ‘다름’에 호기심과 상상력이 자극된다. 마음속 어딘가가, 뇌리의 어딘가가 ‘툭’하고 건드려진다. 영감 같기도 하고, 설렘 같기도 한 기분 좋은 당혹감이 피어오른다. 살면서 만난 또 다른 새로움이었다. 사고와 감정에 파고드는 새로움은 늘 반갑고, 늘 옳다.
호텔의 이모저모를 잘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곳이어서 그런지 한 글자 한 글자가 어렵다. 다행히 애정과 그리움의 크기가 어려움을 넘어섰지만. 단 13개의 객실만 있는 곳으로 13개의 객실이 모두 다르다. 다른 콘셉트와 인테리어 그리고 가구와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13개의 테마가 존재하는 격이다. 13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각각의 객실에 전시돼 있거나 설치돼 있고, 그들은 화가와 조각가이자 사진가, 사회학자이고 시각예술가, 디자이너다. 우리가 머물렀던 코너룸 13번 방은 화가 마크 물데르스(Marc Mulders)의 방이다. 그의 유화 작품 ‘HUNT FOR PARADISE’가 방의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내 키보다도 큰 작품이 아침 햇살을 반쯤 받아 묘하게 빛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눈 비비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미감이 채워지고 영감이 솟아나는 방이라니. ‘내가 예술가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조각가이기도 한 마크 물데르스의 또 다른 작품 ‘Tube Wall’은 호텔 로비에 전시돼 있다. 체크인, 체크아웃하는 순간에도 예술을 수혈받았다.
호텔 핏 헤인 에이크는 오래전 필립스의 세라믹 공장이었다고 한다. 옛 공장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은 낭만 그 자체였다.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이어지는 붉은 벽돌 건물과의 인연. 특별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세월과 빛에 바랜 붉은 벽돌의 핏 헤인 에이크는 만평의 부지 안에 아틀리에와 공방, 오피스와 전시 공간, 쇼룸과 아트샵 그리고 호텔이 공존한다. 체크인을 하기 전 미현은 쇼룸과 아트샵 투어를 먼저 하길 제안했고 그 제안은 기실 탁월했다. 쇼룸은 정글이었다. 현실 세계의 정글이라기보단 판 타지 동화 속 정글. 봐도 봐도 끝없이 펼쳐지는 규모의 복층 공간에 온갖 장르의 예술이 온갖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공간 디자인과 가구, 오브제와 회화 및 조각 작품, 조명과 키친웨어와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달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내 흥분을 바로 감지한 미현은 혹여 내가 무어라도 놓칠까 싶어 구석구석으로 안내했다.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더 정확히는 호텔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셈이다. 할 수 있는 한 사진을 열심히 찍었지만 눈에 직접 담는 만 못했다. ‘영감을 받았다’라고만 말하기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난다. 백화점과 플래그십스토어 등 잘 만들고 잘 갖춰둔 디자인 공간은 세상에 많고도 많다. 하지만 핏 헤인 에이크 쇼룸에서는 디자인보다 철학이 먼저, 만듦새보다는 재해석의 스토리가 먼저 보였기에 감동과 기분이 남달랐다. 익숙하지 않은 소재들이 세련되게 재탄생한 모습도 흥미로웠고, 자연을 오마주한 색감과 선의 미감에 흠뻑 취해버렸다.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의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었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연주홀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때와도 자못 다른 느낌과 기분이었다. 예술이 안겨주는 감정의 결과 겹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고 다양하다는 걸 깨달았다.
핏 헤인 에이크는 든든한 영감 레퍼런스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일과 삶의 영역에서 영감과 아이디어가 절실할 때마다 떠올리고, 추억하고, 찾아볼 곳이 생긴 셈이다. 드디어 체크인을 했고,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원목의 복도를 지나 방에 입성했다. 이름 모를 예술가의 아틀리에를 찾아간 기분이었다. 어느 하나 같은 게 없는 묘한 색감의 타일벽을 지나 크고도 넓은 창을 마주했다. 방의 두 벽면 모두 높이 솟은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슴이 탁 트였다. 창 밖 풍경의 절반이 하늘이었다. 방에 들어선 순간 현대미술의 한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창밖 풍경은 그림 속의 또 다른 그림이었다. 문고리에서 수전과 세면대로, 침대맡 조명과 콘센트, 온갖 버튼으로 이어진 금빛 메탈의 활약이 엄청났다. 따스한 느낌을 안겨주는 패브릭과 원목이 주를 이루는 방에서 메탈은 물성과 색감이 전혀 다른 오브제로 작용하며 아름다움을 한층 끌어올려주고 있었다. 문고리에 걸어두는 DND(do not disturb) 사인마저 은빛 메탈이었는데 진심으로 훔쳐오고 싶었다.
사람과 공간의 상호작용에서 피어나는 시너지를 기대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공간임에도 가구와 오브제가 예술감을 물씬 풍기니 보이는 것과는 달리 화려함이 느껴졌다. 에인트호번행은 앞서 여행한 암스테르담과 뒤이어 이틀 반짝 다녀올 파리 사이에서 쉼이 되길 바랐는데 그 기대와 바람이 제대로 충족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곳이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계획으로 찾아야만 하는 곳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다시 발걸음 할 수 있을까? 인생이여,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길! 오래된 것을 탐닉하는 내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에 이토록 심취하게 될 줄도 몰랐는데 역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올리브그린 색감을 향한 새로운 애정도 생겼다. 방과 로비 그리고 레스토랑 여기저기에서 침대 매트리스와 암체어, 커튼과 소파, 조명에 이르기까지 색의 향연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던 또 다른 발견은 올리브그린이 빨간색과 잘 어울린다는 것. 옷으로 두 색감을 매치해보고 싶은 스타일링 욕심도 얻었다.
말끔한 선과 여백, 딱 떨어지는 매무새,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함을 추구한 예술과 공간도 물론 좋다. 다만 지난 내 삶을 돌아보면 비정형, 약간의 혼돈, 어긋나거나 틀어진 모양새, 오래된 것과 바랜 것, 오묘한 색의 조합에 더 가슴 떨리던 나였다. 복잡해 보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질서와 조화, 빛바래 보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드러나는 아름다움, 낯선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르의 새로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열망과 욕망 그리고 쌓아온 안목이 한 데 어우러진 완성형의 결정체가 눈앞에 ‘호텔’의 모습으로 ‘짜잔’하고 나타난 것만 같더라. 잠자고 있던 감각과 버려질 뻔한 욕심까지 모두 깨워주었다. 현대미술과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세상이 이토록 우아하고 섬세하다니, 이토록 화려하고 다정하다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 간의 인연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나게 되듯, 내게도 꼭 만나게 될 호텔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오랜 세월 여행했다. 핏 헤인 에이크와의 만남이야말로 좋은 친구를 통해 만나게 됐으니 인연이자 운명 아닐까.
계획에는 없었지만 일찍 일어난 김에 부러 조식을 먹었다. 독특하고 멋스러운 공간에서 꼭 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10월 초 핏 헤인 에이크는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덕분에 꽤 오래 공간을 독차지했고 차분하게 식사를 하며 아름다운 것은 모두 열심히 눈에 넣었다. 가구와 키친웨어가 모두 핏 헤인 에이크 제품이었는데 익살스러움이 가득한 어여쁜 디자인에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약 7분 남짓 걸어 공원으로 향했다. 친구 미현에게 아침 산책 필수 코스로 추천받은 ‘필립스 더용 파르크(Philips de Jongh park)’였다. 공원이라 부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거대한 숲이 있는 거 아닌가. 쏟아져 나오는 피톤치드의 양도 엄청났고,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이는 숲의 규모와 모습도 압도적으로 감동이었다.
핏 헤인 에이크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싶었다. 숲엔 모든 색이 있었고,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다름’이 있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주었다. 숲과 호텔이 모종의 계약을 맺은 건 아닐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인간들에게 쉼과 행복을 건네주자는 그런 멋진 계약. 호텔 밖 한걸음도 안 나가도 되겠다 싶었던 생각을 바로 접었다. 숲 속을 산책하고, 숲과 호텔 사이를 거닐며 완벽한 하루를 만났다.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었지만 이미 완벽했다. 연인과 함께 손잡고 한참을 걸었다. 말없이 마음만 활짝 열어둔 채 흙 위를, 낙엽 뭉치 위를, 잔디 위를 거닐고 노닐었다. 친구 미현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도시에 의해 조성된 공원이라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도심 속 자연이 이토록 장대할 수 있다니, 이렇게 지켜질 수 있다니 놀라웠다. 도심 속 자연이 아니라 ‘자연 속 도시’가 에인트호번의 또 다른 이름 아닐까.
체크인을 하던 날 호텔 레스토랑의 셰프님을 우연히 마주쳤었다. 아니, 정확히는 체크인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성큼 다가와 환영과 인사를 건넸었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라면서 본인을 소개하더니만 마침 며칠에 걸쳐 스페셜 디너가 열리고 있다며 꼭 와보라길래 마지막 밤 디너는 호텔에서 했다. 떠나려니 가장 아쉬운 곳은 다름 아닌 핏 헤인 에이크였기에 더 붙어 있고 싶었다. 칵테일 한 잔씩 곁들여 3코스의 식사를 했는데, 메인인 대구 요리와 디저트가 어찌나 맛있던지 피로가 다 씻기는 것 같았다. 밤에 만끽하는 호텔 공간에선 조금 다른 바이브를 느꼈달까. 빛과의 조화가 아름다웠던 아침의 공간이 밤의 어둠과는 어떤 조화를 이루어낼지 궁금했다. 더 아늑하고, 더 녹진한 무드가 감돌았고 은은히 흐르는 재즈 음악과도 참 잘 어울렸다. 공간은 진정 숨결을 가진 걸까? 공간과 오브제 사이, 공간과 나 사이의 교감이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다.
호텔이라는 공간은 분명 내게 놀이터였는데, 핏 헤인 에이크를 만나고 나서는 지위가 한층 격상됐다. 놀이터에서 진화해 예술의 공간으로. 자연과 예술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담은 공간에서 머물고 나니 공간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자연과 예술과 인간이 건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호흡하는 방법을 호텔이라는 공간으로 풀어낸 모습에서 희망과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이토록 아름다운 능력이 있다는 희망과 예술의 세계는 여전히 놀라운 새로움으로 가득하다는 환희.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이었지만, 호텔 핏 에인 헤이크가 다녀가는 이들에게 바라고 기대했을 모든 것을 격렬히, 열렬히 만끽하고 왔다고 메아리를 울리고 싶다. 침대 곁 다이얼 전화기, 온통 빨간색으로 채워져 있던 욕실, 사이사이로 빼꼼히 풀이 삐져나와 푸름을 더해준 돌길, 작품인 줄 알았던 나선형의 계단까지 모두 그립다.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