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Vienna), 오스트리아(Austria)
Chapter 4. 공간에서 만끽하는 입체적인 즐거움 - 호텔
(챕터4를 시작합니다!)
‘나는, 호텔이다’라는 글을 쓴 적 있다. 4년 전 호텔 여행기를 그러모아 쓴 브런치북 <호텔 심리학>의 프롤로그 제목이다. 말인즉슨, 여행의 키워드가 내게는 ‘호텔’이라는 것. 이제나 그제나 여행의 핵심 키워드가 호텔인 건 여전하다. 애정도 열정도 호기심과 관심도 호텔을 향한다. 프롤로그를 다시 읽어보니 진심을 꾹꾹 눌러쓴 애정이 절절하다. 변치 않은 마음과 호텔 이야기라면 밤도 새울 수 있는 이 심정을 세월이 묻은 한 단락의 글로 시작해 볼까.
“나는 도시를 여행한다. 내게 있는 모든 감각을 일제히 깨워 도시 속으로 들어가 맘껏 누빈다. 도시에는 수많은 호텔이 있다. 제각각의 매력을 뿜어내며 나와 같은 여행자를 유혹한다. 도시 여행은 곳곳을 탐색하고 탐험하는 발걸음으로 가득 찬 여정이어야 마땅하지만 도시의 축소판과도 같은 호텔에서의 머무름만으로도 충만하고도 적극적인 여행이 된다. 나의 여행은 기승전 호텔이다. 혼연일체 몰입의 정신으로 내 취향과 욕망에 딱 맞는 곳을 열심히 발견한다. 수없이 자문자답하며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다. 그 선택은 취향과 경험을 향한 욕망의 산물로서 여행의 중심축이 된다.”
세 번째 빈 여행을 앞두고 역시 설렘의 8할을 차지한 건 ‘호텔 탐색’이었다. 그래봤자 구글과 구글맵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온라인 서핑에 불과하지만 행복감은 늘 기대치를 웃돈다는 것. 눈동자가 빡빡해지고 머리가 멍해지면서 어깨가 뻣뻣해지는 부작용이 있지만 기꺼이 감당한다. 세상에 호텔은 많고도 많지만 내 취향은 한없이 좁고 뾰족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간을 오랫동안 지나며 가장 행복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칼날처럼 벼려지는 ‘취향’이다. 특히, 호텔을 향한 취향과 애정이 깊어질수록 여행의 행복감은 수직 상승했다. 끊임없이 ‘왜 좋은지’를 자문자답하며 그려온 취향의 지도야말로 여행 속 보물 1호라 할 수 있겠다.
애정이 깊이 박힌 호텔 취향을 몇 읊어볼까. 우선, 그 도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부티크 호텔을 사랑한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 포진돼 있는 부티크 호텔 브랜드라면 각 도시의 개성을 디자인과 분위기에 제대로 녹여낸 곳을 선택한다. 콘셉트가 있는 호텔이 좋다. 일례로 호텔 모토(hotel motto)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자마자 순식간에 쾌재를 불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호텔 모토의 콘셉트는 바로 ‘VIENNA + PARIS - a Love Affair’다. 빈과 파리의 러브어페어라니! 파리를 향한 빈의 애정, 빈을 향한 파리의 열정쯤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두 도시 사이 애착이 오고 간 느낌이 펼쳐져 있는 호텔이라니. 놓칠 수 없는 시너지 아닌가. 온라인 룸투어를 하며 ‘왜 러브어페어’인지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고아하고 화려한 빈의 도시적 매력 위에 파리의 색과 패턴이 사랑스럽게 수 놓인 풍경에 한여름의 아이스크림보다도 빠르게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러곤 마음에 확신이 솟아났다. ‘바로 이곳이야’의 확신과 보장된 미래를 향한 만족감이 미리 피어올랐다.
호텔과의 만남이야말로 본격 여행의 관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택시에서 내릴 때, 로비에 한 걸음 내딛을 때, 마침내 방 문을 열 때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설렘만은 아닌, 기대와 흥분과 환희와 불안의 실이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다. 그 실타래는 부러 푸느라 고생할 필요 없다. 엉키고 뭉친 실타래를 품은 채 다채로운 감정을 만끽하며 호텔과 함께 하면 된다. 호텔 모토의 첫인상은 '1980년대 로맨스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배경은 다르지만 영화 <전망 좋은 방>이 문득 떠올랐다. 문학적 느낌으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레이디 수전> 속 무도회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호텔로 몇 걸음 들어섰을 뿐인데 바깥세상과 완전히 달라지는 분위기에 매료되고 말았다. 잠들어 있던 상상력이 깨어나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과거의 어느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가 이름 모를 어느 도시에 막 도착한 기분이었다. ‘세상엔 아직도, 아니 여전히 나니아의 옷장이 많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낯선 자극과 새로움이 여전히 나를 춤추게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흐뭇했다.
체크인 수속을 밟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시간 여행’ 기분이 폭발했다. 아치형의 스팀펑크 엘리베이터를 본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19세기 판타지 소설 속 증기기관차에 올라타는 것만 같은,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훨씬 더 이전 시대의 것들을 주로 탐닉하는 나지만, 근대 산업혁명기의 스팀펑크에 이렇게 두 손 두 발 들고 바로 항복하는 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란 걸 처음 알게 됐다. 여행 속 또 하나의 유레카 모먼트였다. ‘발견’과 ‘감동’은 익숙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늘 새롭고 늘 신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은밀하게 속삭일 때 세상과 공명하는 때가 분명 있다고 믿었다. 그때를 종종 맞닥뜨릴 때 삶은 매우 살 만하다. 서울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면 멍하니 디스플레이 속 숫자를 바라보거나 스마트폰 속으로 시선을 파묻곤 했는데 호텔 모토의 엘리베이터는 내 관심을 100% 차지했다. 0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현황을 디지털 숫자가 아닌 시곗바늘의 움직임으로 보고 있자니 자꾸만 흥이 차오르는 거 아닌가.
호텔 입구에서부터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거쳐 방에 이르기까지 ‘기분 지도’가 그려졌다. 온갖 오브제 하나하나에 감탄하는 환희에서 시작해 낯선 시대적 감각을 느끼며 상상을 펼쳐보는 짜릿함을 지나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흥분까지. 내 마음대로 기획 의도를 점쳐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가 이 작품 앞에서 멈춰 서길 바랐을 거야’, ‘엘리베이터의 인디케이터를 보며 흥분할 거라 예상했겠지’, ‘미로 찾기 하듯 방을 찾아가는 길을 즐길 거라 확신했을 거야’라고 말이다. 505호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피로감이 싹 씻길 만큼 많은 유혹과 새로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로비와 벽과 복도에서 각각 다른 조명과 타일, 독특한 계단, 크고 아름다운 화분과 식물에 현혹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돌아보니 가뜩이나 피로에 흠뻑 젖은 데다가 내 짐까지 책임져야 했던 연인에게 이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있었을까 싶다. 워낙 이런 나에게 익숙한 그였지만 이 기회를 빌어 심심한 사과를 건네고 싶다.
드디어 방에 들어섰다. 온라인 룸투어를 하다가 숨 넘어갈 뻔했던 그 방. 여행을 기다리던 두 달이 고문이었던 그 문제의 방. 로비에서 펼쳐졌던 그 세계가 방에도 펼쳐져 있었다. 더 섬세하게, 더 은밀하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기대와 상상을 넘어서는 방의 매력은 열 손가락으로 꼽기가 부족할 만치였다. 오렌지와 브라운 컬러가 은은하게 섞인 조도와 빈티지와 모던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드의 가구가 우아함과 세련미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벽면을 하나 반 차지하는 창과 넉넉한 침대, 시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패턴, 행복을 보장하겠다는 비주얼의 욕실과 창밖 풍경까지 완벽했다. 비밀의 문을 열면 화장실과 작은 키친 그리고 옷장이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린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보다 더 어여쁜 언어로 감동하고 싶었지만 연신 ‘우와~ 우와~’ 의성어를 뱉어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공간마다 예술 작품처럼 자리하고 있는 조명과 욕실의 수전, 문고리와 타월 히터, 심지어 화장지 걸이에 이르기까지 스팀펑크의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우리만의 여행 리추얼인 마리엔호프에서의 저녁식사를 위해 다시 길로 나서야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첫날 이후로도 이 증상은 계속됐다. 이상한 회귀 본능이 발동됐던 것. 아침 먹고 다시 들어오고, 오후에 또 호텔로 돌아와 쉬고, 밤에 돌아와서도 잠을 청하기보단 공간과의 깊은 교감을 즐겼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하나씩 숨어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아름다운 패턴의 자수가 수 놓인 벽지가 참 특별하다 생각하며 벽을 감상 중이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 문이었다. 연인과 함께 꺄르르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의 벽문을 열어보니 키친이 펼쳐졌고, 전자레인지와 식기세척기까지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재미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호텔의 물이 지하수라는 것. 체크인할 때 매니저가 제일 먼저 꺼낸 한마디였다. ‘물이 지하수니 마음껏 마시라’라는 한마디. 신박한 환영사이자 호텔 소개 아닌가. 그래서 방엔 생수가 없는 대신 아리따운 물병과 물 잔만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물을 벌컥 들이켰는데 놀랍게도 물 맛이 꽤 좋았다. 미니바가 없는 대신에는 소파 곁 작은 원형 테이블에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도구가 구비돼 있었다. 셰이커와 얼음 트레이, 디자인이 근사한 두 종류와 잔, 여러 종류의 진과 보드카 그리고 레몬과 라임. 칵테일을 만들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방에서 편안하게 마실 수 있다는 묘한 안도감과 만족감이 우리를 기쁘게 했다. 각종 조명과 거울, 공간 구석구석의 스팀펑크 오브제들과 선과 색이 아름다운 가구들이 적재적소에서 향연을 펼쳤다. 최적의 팀 플레이를 구사하는 사물과 공간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작은 거울 하나도, 샤워 공간의 바닥 타일 하나도, 다이닝 테이블 아래 시선을 끌어당기는 카펫 하나도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재미 포인트의 두 번째이자 핵심은 방의 형태가 ‘비정형’이라는 것이다. 공간의 모양새가 직사각형도 정사각형도 아닌, 각 면의 길이가 다른 오각형 내지는 육각형이었다. 온전한 육각형이라기보다는 멋지게 의도적으로 일그러뜨린 육각형. 뻔한 게 하나 없으니 감성도 상상력도 끝없이 자극됐다. 이런 공간과 만날 때마다 조금 비틀어진 것, 약간 벗어난 것, 의외의 조합,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시선을 향한 나의 애정을 확인한다. 그러고는 나의 ‘취향 아카이브’에 유의미한 데이터로 저장한다. 새로 만난 세상에 나는 어떻게 감응하는지, 좋은 것을 맞닥뜨렸을 때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세밀히 관찰한다. 어느새부턴가 어느 곳으로 여행을 떠날지보다 ‘나를 관찰할 준비가 되었는지 ‘를 먼저 살피고 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든 나답게, 나만 아는 행복과 충만함에 둘러싸여 여행할 수 있다. 끊임없이 ‘왜 좋은지’를 생각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은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신경 쓸 것들, 알아야 하고 따라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삶에서 온전히 ’ 내가 좋아하는 것‘, ’ 세상과 내가 교감하는 방법’에 집중할 수 있는 게 바로 여행이고 말이다.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친구처럼 나를 위해 잘 고른 호텔도 계속 붙어 있고 싶다. 밥도 커피도 술도 호텔에서 하며 종일 붙어 있고 싶은 욕망은 도시여행자에겐 조금 위험하지만. 시차 적응 덕분에 이른 새벽에 깨어나 고요한 목욕을 즐길 때가 바로 ‘여행의 사색’으로 빠져들 절호의 기회다. 호텔 모토에서는 매일 새벽 이 천금 같은 시간을 누렸다. 자꾸만 들어가 머물고 싶은 욕실 때문이었다.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배쓰밤을 풀어 몸을 뉘이고 나면 피로는 사라지고 영감이 피어났다. 잠들어 있는 창밖 도시 풍경을 향하던 시선은 어느새 다시 공간의 디테일로 향했다. 멋진 만듦새와 우아한 색,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디자인과 색의 조화를 열심히 감각했다. 내 마음에, 기억에, 피부에 다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우아하거나 화려하기만 하면 재미없다. 호텔 모토는 우아하고 화려하면서도 스팀펑크 요소와 파리와 빈의 러브어페어가 가미돼 전혀 새로운 장르가 되었다. 호텔 뜰을 밟는 순간 그 어느 도시도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마치 내 오감과 미감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누가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과 감각의 문을 열고 공간에 나를 던질 때 차고 넘치도록 영감을 부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아침엔 커피살롱 같은 방, 오후엔 서재 같은 방, 밤엔 남몰래 다락방에 꾸민 바(bar) 같은 방이었달까. 분명 같은 모습인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마법이 펼쳐진 듯한 사흘 밤은 꿈결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판타지가 불쑥 자기 모습을 내민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알아볼 수 있어 기뻤을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는 럭셔리가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다. 알고 싶기보다는 감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 순간이 바로 럭셔리다. 판타지와 럭셔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누빈 공간 호텔 모토, 온 힘을 다해 영원히 잊지 않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