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t Hem(엣헴) in 스톡홀름, 스웨덴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가슴이 간질 거리며 사르르 떨렸다. 색이 바랜 빨간 벽돌의 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뭔지 모를 묘한 감정이 혹시 느껴질까 하고. 100년의 세월을 머금고 있는 건물이라면 벽돌 하나도 예사롭지 않을 것만 같아서. 세월의 흔적은 물론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배어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붉은 벽 사이 세월의 흔적을 짙게 품은 커다란 목재 문이 단단하게 서 있다. 오래된 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묘하다. 잠시간 바라보고, 만져본다. 그래야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것만 같아서. 붉은 벽돌은 어쩌다 내게 로망이 되었을까. 세계 어느 곳에서 만나도 설레고 가슴이 뛴다. 드디어 만났다. 나를 끌어당긴 곳, 내가 나를 초대한 곳. 도시가 나를 불렀다기보다 호텔이 나를 도시로 불러들였다. 스톡홀름에서만 만날 수 있는, 100년의 시간을 머금은 아름다운 저택, 부티크 호텔 엣헴(Ett hem).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오늘 체크인할 사람 중 아마도 내가 마지막이었던 듯. 저녁 7시경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기다림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문 너머로 계단을 내려오는 인기척이 들려오는데 마치 오랜만에 가족과 상봉하는 기분마저 들더라. 문이 열렸다. 환한 미소와 함께 진한 환영을 받고 나니 안도감과 평화가 찾아왔다. 안으로 한걸음 들어선 순간, 그러니까 정확히 정원과 돌계단을 마주한 순간 피로가 싹 가셨다. 홈페이지 사진을 닳고 닳도록 보고, 호텔 곳곳에 나를 가져다 둔 장면을 수없이 상상하던 곳에 발을 들인 것이다. 스톡홀름에 도착한 첫날 행복은 이미 한도 초과였다. 물론 찰나였지만 그 찰나의 힘이 나머지 여정을 견인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2박 3일 호텔 엣헴에서의 시간의 농도와 깊이가 한 주간의 스톡홀름에서의 그것들을 능가했다.
물론 행복감의 이면도 존재했다. 그건 바로 숙박비의 크기와 가치. 2박의 가격이 프로모션으로 달콤하게 확보한 항공권 가격보다 비쌌다. 당시 나 자신에게 건넨 과감한 투자였기에 본능적으로 그 가격에 비례하는 아니 가격을 잊게 만들어주는 가치와 감동이 있길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염원과 소원이 현실이 됐다는 걸 순식간에 깨닫게 되니 남은 건 즐겁게 누리는 것뿐이었다. 스웨덴어로 엣헴은 '집'이다. 떠올리는 순간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는 한 글자 낱말 중 가장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는 ‘홈(home)‘. 집이라 부르기보단 저택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이지만 분명 집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호텔은 아마 세계 곳곳에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집의 아늑함과 특유의 공기가 느껴지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느낌을 안겨주는 호텔의 수는 그보단 훨씬 적지 않을까.
호텔 엣헴은 작은 럭셔리와 큰 아늑함이 이루어낸 조화의 산물이다. 신비감마저 자아내는 비밀스러움과 심미안을 자극하는 미감으로 가득하다. 테이블 위 작은 오브제에서부터 계단과 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디자인과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무엇도 그냥 지나치지 말라며 정신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댄다. 그 기분 좋은 찔림에 무엇이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자세히 보다 보면 관심과 애정이 싹튼다. 그 관심과 애정엔 연속성이 있는지라 다른 영역으로 확장되고 연결된다. 무게감이 상당한, 잘 보존된 골동품의 모양을 띤 열쇠는 가지고 다니기에 부담스러웠음에도 잊을 수 없다. 호텔이 머금은 세월과 아날로그를 향한 그리움이 깃든, 호텔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추억한다. 스톡홀름 여행을 통틀어 가장 갖고 싶었던 물건이다. 조심스레 물어라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한동안 후회 속에 살았다. 하지만 가질 수 없었기에 더 애틋한 추억 아닐까.
호텔로 들어서며 힐끔 본 정원이 계속 눈앞에 아른 거렸다. 밤의 정원이라니, 이토록 고요하다니. 방에서 받은 감동의 기분을 더 길게 지속하고 싶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스톡홀름과의 첫 조우를 밤의 정원에서 차분하게, 느리게, 고요히 만끽하고 싶었다. 짐은 일단 던져둔 채 고양이 세수만도 못한 세수를 빠르게 마치고 정원으로 향했다. 나무와 넝쿨이 붉은 벽돌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배경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모습은 그림이었다. 그 곁에서 어여쁘게도 타오르고 있던 모닥불 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 그 순간에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오렌지빛을 발산하는 조명 아래 자리를 잡고 바깥세상이 아닌 정원의 한편을 바라보며 쉼을 가졌다. 이 기분 좋은 세상과의 단절이야말로 여행의 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드와인 한 잔을 주문하고 더 깊은 단절로 빠져들 채비를 했다. 생각이 저절로 버려지는 순간이 살면서 얼마나 될까. 그 귀하고도 귀한 ‘생각은 없고 느낌만 있는’ 순간을 사치하듯 만끽했다.
12개의 방 중에서 9번 방에 머물렀다. 모든 방이 다른 인테리어와 가구, 오브제 그리고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 9번 방 만의 매력과 분위기를 이틀밤 동안 독차지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더라. 침대 곁 탁자 위에는 종일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을 듯한 아트북과 잡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위로 무심히 걸려 있는 흑백 사진과 그 곁에 시크하게 서 있는 블랙 스탠드 조명이 마치 예술 공간과도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창가에 있는 테이블 위에선 정원을 바라보며 꼭 글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작가의 방이라 이름을 붙여주고 싶더라. 따스함이 감도는 암체어와 어여쁜 원형 테이블 그리고 크고 포근한 침대와 대리석이 빛나는 욕실까지 모든 게 아름다웠다.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강렬한 힘이 느껴졌달까. 방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그 각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개성을 뽐냈다. 시선을 붙잡는 건 공간미와 디자인뿐만이 아니었다.
창가 책상에 놓여 있던 소책자 <The Seasons at Ett Hem>을 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여행 중 얻은 보물 1 호격이다. 사계절 동안의 엣헴의 모습이 어여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려져 있고, 로컬 베이커리와 카페, 레스토랑 등이 소개돼 있다. 엣헴이 추천하는 스톡홀름 중심가의 쇼핑 스폿도 손그림 지도와 함께 항목 별로 리스트업 되어 있다. 첫 장을 열어 마지막 장을 덮는 동안 새어 나오는 미소를 멈출 길이 없었다. 마치 나만을 위해 준비된 손그림 동화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디테일은 작은 발견, 작은 기쁨에 불과하지 않다. 좋은 에너지와 기분을 줄곧 유지할 수 있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또 하나 종종 추억하는 즐거움은 '조깅을 위한 그림 지도'인데, 벽장을 열어 슬리퍼와 로브를 꺼내다 발견했다. 정갈히 접혀 있던 이 작은 지도를 펼쳐보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슬펐을까. 이 사랑스러운 지도를 들고 아침마다 동네 어귀를 경쾌하게 산책할 수 있었다. 이방인인 나를 호텔 엣헴과 동네가 토닥거려 주는 느낌이었다. 나를 받아들여주는 기분, 여행자에겐 언제나 최고의 선물이다.
호텔 엣헴의 아침 풍경이 무척 궁금했다. 기대 이상의 숙면을 하고 조식을 먹기 위해 키친으로 향했다. 수염과 미소가 인상적이던 한 셰프님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응접실이든 키친이든 정원이든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조식을 주문하라 일러주었다. 2번에 불과하지만 그 소중한 조식의 순간을 꼭 다른 공간에서 누려보겠노라 계획했다. 응접실 중앙의 푹신한 소파에 자리를 잡고 하루의 진정한 시작인 첫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선하게 내려준 커피는 내 몸의 모든 세포와 감각을 깨워주었다. 모든 식재료는 로컬에서 유기농으로 공수받는다는 엣헴의 키친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갓 구운 빵과 요구르트, 각종 치즈와 허브가 올려진 스크램블 에그, 신선한 과일이 한 상 차려졌다. 보암직 먹음직은 물론 2시간 정도 조식을 즐기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은 더 느슨해졌고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머무르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해졌다.
서재로 향했다. 그곳엔 온갖 종류와 장르의 책과 음반이 두둑 쌓여 있었다. 그중 1910년 저택으로 지어져 호텔로 변모하기까지의 엣헴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있었다. 그 두꺼운 노란 책 속 히스토리를 몇 읽고 나니 호텔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계절마다 혹은 매해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상상해 봤다. 얼마나 좋을까! 느린 즐거움에 취해있던 차 아침 햇살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빛을 받아 더욱 검게 빛나는 피아노로 시선이 옮겨갔다. 기억나는 곡도 없고 가까이 안 한지도 오래인데 피아노는 왜 그리도 사람을 끌어당기는지. 어느새 그 앞에 앉아 서툴고 투박하게 피아노를 두드려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는 거 아닌가. 자꾸만 내 마음을 툭툭 건드리며 ‘이것도 봐봐, 저것도 해봐’라며 나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공간의 힘이자 공간과 나 사이에 흐른 교감과 상호작용이었으리라. 작지만 확실한 행복감에 겨운 순간이었다.
공간을 추억할 때 그곳의 아름다움도 물론이지만, 그 공간에서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잊지 않기로 한다. 충만한 표정과 행복에 겨운 마음으로 빛나고 있었을 나, 호기심 한가득 어떤 작은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아 집중하고 관찰하며 오롯이 즐거워했을 나, 잠시나마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시선과 손길을 여기저기에 두었을 내 모습 말이다. 공간과 추억만큼이나 그 시공간 속의 나도 어여쁘게 바라보기로 한다. 공간은 물리적이지만 매우 심리적이며 때론 영적이기까지 하다. 어린 시절 기억과 여행의 추억이 뒤섞여 어떤 영감이 강하게 찾아오는 순간을 선사해 준다. 퇴직하신 지 꽤 오래지만 여전히 현역의 아우라를 뿜어 내는 아빠는 군인이셨다. 그리하여 어릴 적부터 꽤 오랜 시간 우리 가족은 관사 생활을 하며 살았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의 형태인 관사에서도 몇 해 살았었지만 줄곧 아파트 관사에서 살게 되었다. 어렸던 당시엔 특별히 의식하진 못했겠지만 주거 형태가 바뀌니 움직임과 놀이에도 변화가 있었고,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에도 분명 차이가 있었으리라.
그때부터 시작된 계단과 마당을 향한 남다른 애정은 기억한다. 삼 남매가 휘젓고 다니며 뛰어놀기엔 집이 좁았던 것일까. 공상이 생활이었던 나는 어느 날부턴가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곳은 성(castle)이고, 우리 집은 내 방이라고 여겼다. 이런 재미난 상상이 어떻게 왜 시작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것을 보면 삶의 어느 결정적 시기에 아로새겨진 공간을 향한 상상은 평생 내게 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아파트가 성이 되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오르내리던 계단은 한 칸 한 칸 소중하다 못해 특별해졌다. 그때부터는 남의 공간이 아닌 내 공간이 되면서 나름대로 생각해 낸 성 안을 거니는 사람의 태도와 몸짓을 하게 된다. 영혼 없이 빠르게만 휘리릭 지나치던 지루한 계단을 사뿐사뿐 찬찬히 오르내리고, 내 방에 다다르기까지 그 수를 세어 보고, 영화 대사를 치듯 혼잣말을 연거푸 내뱉으면서. 돌이켜 기억해 보건대 단 하루도 그 계단은 똑같지 않았으리라. 물론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쟤는 대체 왜 저럴까’의 눈길을 받았던 날들도 단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었다.
호텔 엣헴을 경험하고 난 후 몇 년 간 소위 말하는 ’ 덕질’에 빠져 지냈다. 몇 년 전 즐겨보던 넷플릭스의 다큐시리즈 앱스트랙트(Abstract)의 ‘디자인의 미학’ 편에서 호텔 엣헴이 등장해 깜짝 놀랐다. 다섯 번을 돌려봤다.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일세 크로포드 편이었는데 그녀가 엣헴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했다는 것. 세계적인 다큐에 등장한 세계적인 호텔에 머물렀던 나도 세계적인 사람이 된 듯한 그 찰나의 기상천외한 착각. 흠, 나쁘지 않았다. 엣헴은 ‘스몰 럭셔리 호텔(Small Luxury Hotels of the World, 이하 SLH)’로 선정돼 있다. SLH는 90개국의 약 570여 개의 호텔을 선정하고, 소개하고, 예약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 큐레이션 플랫폼이다. 오너 또는 건축가의 인터뷰를 싣는 저널을 운영하는데 읽을 거리가 충만하다. 마침 엣헴의 오너인 예아네테 믹스(Jeanette Mix)와의 심도 깊은 인터뷰가 있어 정독했다. 역시 만든 사람의 철학과 그간의 역사를 이야기로 보고 듣는 것의 힘이란 대단하다. 많은 내용에서 귀감을 받았지만 그중 기억하고픈 문장은 다음과 같다.
“I have never been a believer in trends, instead I rely on timelessness. “
(나는 트렌드를 믿은 적이 없으며 대신 시대를 초월한 것에 의존합니다.)
멋대로의 해석이자 끼워 맞추기로 들릴진 몰라도 내 여행을 말하는 것 같아 너무 기쁜 한 문장이다. 시대를 초월한 것을 향해 보물찾기 하듯 빨려 들어가듯 여행하는 나이기에 호텔 엣헴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트렌드를 믿지 않아도, 내가 의존하는 것과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때 공간은 물론 사람도 호텔 엣헴처럼 될 수 있겠다는 용기와 자신감이 차올랐다. 닮고 싶은 공간을 만난 일생의 기쁨과 추억을 바라지지 않도록 잘 갈고닦으며 살고 느끼고 여행하자. 이 기회를 빌어 질문을 건네볼까. 당신이 의존하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