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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ad for Travel

고르키(Gorki)로 추억하는 베를린

Vielen Dank, Berlin! #1

by Wendy An

지난해 추석 즈음 달콤쌉싸름했던 한 주간의 베를린 여행을 가끔, 아니 자주 추억한다.

랜덤으로 떠오르는 순간, 장소, 느낌, 맛, 온도, 장면 등이 따로 또 같이 베를린을 향한 짙은 그리움을 일으킨다.

단 한 주간 머물렀던 그 도시가 왜이리도 그리운걸까. 그리움이란 모습을 띤 아쉬움일런지도 모르겠다.


베를린 여정의 산뜻한 첫 걸음, 그 충만했던 시작과 마무리 여정의 일등 공신 8할은 단연 아파트먼트 호텔 '고르키(Gorki)'였다. 마치 호텔이 어떤 한 존재인 듯 '고마워, 고르키!'를 마음 속에서 여러 차례 외치곤 했다. 나흘간 고르키에 머무르며 서서히 사랑에 빠졌다랄까. 오랜만에 내 선택에 셀프 칭찬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탁월한 선택이었다.


유럽의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나름 지키고 싶은 원칙과도 같은 위시 리스트가 있는데 바로 그 도시에서만 가볼 수 있는 로컬색이 짙은 부티크 호텔을 면밀히 찾고, 그곳에서 사나흘간 머무는 것이다. 그 도시, 그 호텔에서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정취나 매력 또는 역사가 깃들어 있고, 그것들이 여정에 안겨주는 확실한 기쁨이 있다. 오래된 역사 또는 특별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부티크 호텔이라면 뿌듯함스러운 즐거움은 배가된다.


체크인, 그리고 체크아웃을 진행하며 잠시 머물렀던 고르키 리셉션


고르키는 베를린 미테 지구, 로젠탈러 플라츠 역 바로 인근에 있어, 여정 중 위치적 장점이 큰 몫을 한다. 목적지에 따라, 원하는 경로에 따라, 버스나 트램 또는 U-Bahn(지하철)을 로젠탈러 플라츠 정류장에서 한 꺼번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테지구 내에선 웬만한 곳을 심심치 않게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다녀보니) 꽤 큰 매력이었다. 역 이름 대로 광장(platz)처럼 길이 사방에 펼쳐져 있어 느낌대로 방향이나 행선지를 선택해 무심코 다닌다 해도 왠지 실패가 없을 것 같은 동네였다. 도착한 첫 날 잠깐의 밤산책 동안에 금세 가질 수 있었던 느낌이었다랄까.


여행을 다니다보니 이 도시가, 이 동네가, 이 길이 그리고 이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 주는지 내 멋대로 근거를 찾고 나름 가늠해보곤 하는데, 베를린은 마치 그 모든 탐색전은 생략하라면서,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네는 멋지고 쿨한 친구 같은 첫인상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고르키 덕분이었겠지.


아늑함만으로도 two thumbs up을 주고싶었던 룸 Benno, 그리고 마법의 침대

시크한 블랙이 주를 이룬 키친 공간이 정말 매력적이다. 요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일기도 쓰고 지출내역도 끄적였던 곳


유럽을 다니면 다닐수록 점점 더 아파트먼트 호텔이 좋아진다.

멋지게든, 어설프게든, 잠시 잠간이라도 일상을 살아보듯 로컬 라이프를 흉내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르키는 집같은 cozy함도 있지만, 여행자의 설렘이 유지될 수 있는 극치의 적당함을 지닌 호텔스러움도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 절묘한 조화가 유니크한 매력이었음은 분명하다.


하루 중 어느 때곤 로컬 식재료로 장을 봐와선 간단히 요리를 해볼 수도 있고, 시차 적응에 부대낄 때면 몇시곤 일어나 따스한 차를 내려 마시며 내일의 여정을 변덕스럽게 그려볼 수도 있다. 이 곳에서 하는 식사 후 설거지는 기분이 제법 묘하기도 한데, 평범한 일상을 베를린에서 시작하고 또 마친 기분이 들어서 인 듯하다.


밖에 나서기 전 내려 마시는 캡슐 커피 한 잔은 일상을 시작하는 듯한 기분에 여행자의 설렘이 얹어져 역시 묘하다. 이른 아침 욕조에 몸을 담그고 느릿한 재즈곡을 듣는 건 마치 특권같았다. 눈을 감고 기대어 누워있지만 생동감이 역동적으로 넘치던 순간. 루틴한 삶에서는 흔치 않을 감정을 만끽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구석 구석을 살펴보다보면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뷰가 발견된다.

이렇게 바라봐도, 저렇게 바라봐도,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머금은 미소는 커져만 간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급하게 정드는, 그런 매력적인 사람이 있지 않은가. 고르키는 그런 사람 같았다랄까.




고르키 호텔 사용설명서, 룸 키, 웰컴 쿠키 그리고 룸 슬리퍼와 로브. 사흘 내내 로브의 승리였다.


여행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준 것 같아 은은한 감동이 밀려왔다. 매일 같이 채워지는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 그리고 로컬 유기농 설탕과 고르키와 '친구'지간인 Paper & tea에서 공수된 여러 tea는 beyond 즐거움이었다. 재미났던 건 경남 하동 녹차도 있었다는 것! 고르키에서 묵던 마지막 날 Paper & tea에 찾아가 실컷 시음, 시향, 그리고 구경하며 블랙티와 허브티를 구입했다. 한국에서의 추운 겨울 내내 베를린 향내나는 따스한 차를 홀짝이며 여행을 추억하는 것도 제법 행복한 순간이었다.

시차 적응에 이틀 간은 새벽 3시즈음 꼭 잠에서 깨어나곤 했는데 기분에 따라 고르고 우려 내린 뜨끈한 차 한잔은 최고위 위안이었다. 내 마음을 나보다 한 발치 앞서 읽어준 것만 같아 고르키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행자, 방랑자의 마음을 이렇게만 읽어줄 수 있다면 분명 금세 친구가 되지 않을까.

머물렀던 룸의 이름은 BENNO였다.

모든 룸에 이름이 있고, 모든 룸은 인테리어와 가구와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다시 베를린에 갈 수 있다면 단연 고르키의 다른 룸에서 묵어보고싶다.

고르키에 가고싶어 베를린이 가고싶은지, 베를린에 가고싶어 고르키를 추억하는지 모르겠다.


고르키 아파트먼트의 상징적인 공간은 어쩌면 이 중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줍은 듯 사랑스럽게도 중정 한 켠에 이렇게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다.

호텔을 나서며 들어서며 잠시라도 멈춰 서서 머물거나 살짝 앉아 쉬어가던 곳이다.

자연스레 고르키 직원들 또는 다른 여행자들과 눈으로 말로 인사를 나누게되기도 하는 곳이다.

다음엔 PENT HOUSE 2에 머물러 보길 꿈꿔보는 건 어떨까.

Hans도, LORENZO WINTER도, Clara Ludwig도 실은 궁금하다.

다음을 위해 룸 투어를 해보았다면 좋았을걸, 이란 뒤늦은 아쉬움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추억은 잠시라도 나를 '순수하게’ 웃게하는 걸 보니 여행은 도저히 멈출 수 없을 듯하다.

비가 온 뒤 더 운치 있는 고르키 정원.

의도된 듯 아닌 듯 각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오브제들의 조화가 담백허니 독일스럽다.

호텔 정원에서 받은 느낌, 인상은 베를린의 지극히 일부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지금, 그리움을 벗삼아 그 때를 떠올려보니 고르키는 베를린을 꽤 잘 보여주었단 생각도 든다.

첫 눈에 반하면 뭔들 안예쁠까. 이러니 고르키가 8할을 한 셈이다.

호텔의 룸도 정원도 어느 곳도 (비용을 지불하고) 머무는 동안은 다 내 것, 내 공간이다, 라고 생각한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부러 여기 저기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즐거움은 물론이고 도시를 향한 호기심도 배가되는 것만 같다.


여정을 시작하러 나설 때는 호텔의 공기와 분위기가 뿜어내는 듯한 에너지를 내게 나눠주는 것 같았고, 여정을 마무리할 때면 베를린스럽게 특별하고 매력적인, 어떤 은밀한 공간에 스윽 들어가 넉넉한 품에 포근히 안기는 것 같았다랄까.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든 두 발로 거닐 때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지만, 때로는 호텔 한 켠에서 자리를 잡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 더 충만해지는 찰나의 순간들도 분명 있음을 알게됐다. 그렇게 내 상상 속 스토리가 내가 다다르는 곳마다 더해질 때 마음 속에선 더없이 충만한 여행이 펼쳐진다.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여행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가보다.

두 발이 어딘가로 향하기 전, 호텔에서 내 멋대로 그려본 스토리가 그 여정의 진짜 시작일지도.


오늘은, 고르키로 베를린을 추억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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