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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ad for Travel

커피, 지극히 베를린스러웠다 (1)

Vielen Dank, Berlin! #2

by Wendy An

어느 곳, 어느 때, 어떤 여행에서도 커피만큼의 특효약은 없다.

유럽은 몇몇 도시마다 그 도시스럽게 형성된 커피씬이 있고, 그 도시들 중 베를린은 단연 커피향이 짙고도 짙은 도시다. 와인 한 잔을 벗삼아 끄적이고 있는 지금도 마치 기억 속 '그 베를린 커피향'이 나는 듯 그리움이 피어난다.


매일 아침을 여는 오전 어느 시간의 첫 커피가 내겐 가장 맛있고 향긋하다.

하루를 제대로 여는 기분이랄까. 무어든 오늘 해볼만하겠다 싶은 한 방울의 자신감을 마시는 짧은 순간이랄까.

더 멋진 리추얼이 있다면 기꺼이 찾아보겠지마는 아직은 여전히 첫 커피 첫 한모금이 주는 기쁨과 위안이 제법 크다.


일상에서의 커피가 전투를 준비하는 마인드라면 여행에서의 커피는 친구이고, 위로이고, 역설적이게도 비타민이다. 설렘 가득한 이른 아침의 첫 커피, 점심 식사 후 여행의 분초가 아깝다며 졸음을 달래려고 마시는 커피, 늦은 오후 지친 몸 달래며 에너지 충전이라며 홀짝이는 커피, 시차 적응 중이니 카페인의 방해는 문제도 아니라며 늦은 저녁 꼭 가고 싶었던 카페로 달려가 달콤함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는 커피.


계획대로, 때론 무계획으로 베를린의 카페를 누비고 누렸다. 베를리너들이 어떤 카페에서 어떤 커피를 즐기는지 깊숙이 들여다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들이 만드는 공기, 온도, 분위기, 그리고 맛과 향까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싶었다.


베를린에서의 첫 커피는 Gorki에서.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의 재발견 혹은 기분탓


누군가에게 전해듣기론 베를린 커피씬은 바리스타들과 카페 오너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교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커피씬으로 모여들고 있는 이유일 터. 협력과 교류가 만들어낸 젊고, 생동감 넘치고, 자부심 가득한 베를린스러운 커피 그리고 카페 문화는 마치 100여년 전부터 유럽 도시들의 예술과 문화의 근간이었던 살롱의 현대적 재해석 또는 재현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가끔 하곤 하는 상상의 경계선에서 늘 꿈꿔보게 되는 게 있는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20세기 초반의 유럽 어느 도시로든 날아가 문학도와 미술가와 음악인들이 한 데 모여 예술을 찬미하고 작품으로 교류하며 열띤 논쟁을 펼치는 그 순간을 어느 한 구석에서 면밀히 구경하는 것이다. 이 갈망이 늘 내 여행에 반영되어 온 셈이다. 무심코 지나는 듯한 여정 중에도 늘 마음 깊은 곳에서 모든 생각과 감각에 프레임이 되어주었던 듯싶다.


설렘 한 가득 세웠던 계획 그리고 부풀어 오른 야망만큼 커피를 많이 마시지도, 카페를 실컷 가보지도 못했지만 모든 공간과 모든 커피, 그리고 마주했던 모든 사람들을 선명히 기억하고 추억한다. 역시나 미천한 내 표현력과 언어로는 그 매력과 감동을 모두 옮길 수 없어 안타까움 가득이지만, 수줍게 남겨본 사진으로 그 느낌을 대신해볼 수 있을까.



ZEIT FÜR BROT

심플하지만 임팩트 있는 이름, 대략 '빵을 위한 시간'이란 의미란다. 발음은 어렵지만 기억 속에선 강렬한 이름. 시그너처인 시나몬롤을 필두로 여러 '빵'이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명성이 자자한 곳. 발걸음 해보니 베를리너들의 아침 라이프 풍경을 실컷 구경(?)해볼 수 있었다(생각보다 흥미로운 일). 머물렀던 고르키(Gorki) 호텔에선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있어 아침 산책 그리고 간단한 요기를 하기에 탁월한 곳이었다.

작지만 실속있게 배치된 공간 구성이 주는 느낌이 '딱, 베를린스럽다'였는데, 근거는 빈약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베를린 곳곳에서 자주 느끼곤 했었던 점이다. 대부분의 공간에서 실용적인 디자인과 가구 배치, 그리고 '비움'의 미학을 보고 느끼곤 했다. 물론, 동네 사람들의 온기와 직원들의 친절함, 치명적인 빵냄새와 아늑함도 충만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베를린은 어디에서건, 어느 공간에서건, 거의 모든 세대를 만나게 된다. 베이비부터 그랜드파파까지. 카페도 결코 예외가 아닌 점이 매력이기도 하고 부러운 요소이기도 한데, 온 가족의 카페 나들이가 이들에겐 평범한 일일 뿐만 아니라 루틴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베를린을 향한 질투는 대부분 느낌으로만 체험할 수 있었던 어떤 문화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이 또한 그러했다. 어느 한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리니. 잦은 경탄의 순간이 반복됐다.

플랫 화이트의 하트가 예쁘지 않아 미안하다던 사랑스러웠던 바리스타의 미소를 기억한다. 아무렴 어떠리, 커피는 훌륭했다.

아침 식사겸, 그리고 하루를 또렷한 정신으로 열어 보고자 하는 장엄한 리추얼겸 플랫 화이트와 시나몬롤을 주문했다. 에스프레소의 비밀일지, 우유의 비밀일지, 바리스타의 마법일지는 여전히 그 공을 논하게 되는 바이지만, 플랫 화이트가 참말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따스하기가 지극히 적당했음은 보너스였다랄까.


시나몬롤에 대한 묘사가 관건인데... 무심하게 툭! 포크가 한 중앙에 꽂아져 나오는 플레이팅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고 재미지다. 따끈하고 포슬한 식감에서 첫 번째 놀라게 되고, 다음으로는 내가 알던 시나몬 맛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새롭기 그지없는’ 시나몬 맛에 놀라게 된다. 마지막엔, 단 맛은 예상보다 (고맙게도) 적은데, 달콤한 향이 모든 공을 가로채는 듯한 묘한 맛과 향의 조화에 감동하며 순식간에 먹어 치워버리게 된다. 그리움이 짙어질 때면 의외로 다른 어떤 음식보다, 이 곳의 시나몬롤을 제일 그리워 한다.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향의 강력함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




FIVE ELEPHANT

Zeit für Brot와 같은 Alte Schönhauser 거리(Strase)에 있는 베를린, 미테 지구를 대표하는 카페 중 한 곳이다. 베를린의 몇 안되는 아르 누보 양식의 독특한 건축물과 중정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다는 Hackescher Höfe로 열심히 향하던 중 실은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30여분쯤 조금 게으르면 어때, 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다시 돌려 향했던 곳이다. 마음엔 두고 있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곳이기에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런 뜻밖의 작은 발견으로 인해 여행의 순간 순간이 활력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블랙 & 화이트의 전체적 느낌이 베를린스럽게 담백하고 시크하다. 테이블과 쇼케이스의 대리석 컬러와 느낌이이 곳 사람들의 밝은 친절함과 잘 어우러져 금세 포근함을 선사해주었다. 에스프레소 맛과 향이 더 진하게 나는 무게감 있는 플랫 화이트를 마셨다. 묵직한 듯한 맛에도 불구하고 혀에 닿을 때와 목넘김에서의 실키함은 극치였다. 베를린 커피의 주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궁극의 부드러움'은 비단 플랫 화이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곁들인 (애플잼이 숨겨져 있던) 크로아상은 직원의 추천이었는데 플랫 화이트와 성공적인 맛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토록 여유있고 행복한 평일의 오전 시간이라니, 그것도 베를린에서...란 감탄이 어쩌면 맛에 가장 큰 공여를 한 듯했던 건 안비밀.

커피로 추억하는 베를린. 기억 속에서 베를린이 더 좋아진다.


더 오랜 시간 함께 있고 싶었던 매력 덩어리 친구, FIVE ELEPHANT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FIVE ELEPHANT의 마스코트는 이 녀석이다. 안타깝게도 이름을 기억할 순 없지만 이 곳을 쉬이 떠날 수 없었던 큰 이유였다. 독일어로 인사를 해야 화답을 해줄 것만 같아 연신 hallo를 외쳐보기도 했다. 그런데 실은 이 녀석이 먼저 다가와주었고 우리는 결국 입을 맞추는 각별한(?) 친구가 되었다. FIVE ELEPHANT를 방문하는 거의 모든 이들이 이녀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대부분이 이녀석의 눈높이에서 인사를 건넸다. 존재감이 가히 남달랐던, 사랑스러웠던 이 친구와의 만남으로 자연스레 카페 사장님과도 친근하게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즐거운 여행을 기원해준 그 덕분에 이미 좋은 여행이 된 것이나 다름 없던 순간이었다.

커피맛, 이라는 본질이 살아 있지마는, 그에 더해 베를린 카페엔 독특한 공기가 흐른다.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공간 배치가 하나의 특징이지만 아늑함과 편안함 그리고 따스함이 공존한다. 사람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여유인지, 직원들과 공간에 서린 특별한 매력인지, 베를린의 문화가 스며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면 단연 카페다. 그 공기와 분위기를 충분히 느낀다면 베를린 문화의 한 면은 깊이 체험한 것과 다름 없을 듯하다.




FATHER CARPENTER Coffee Brewers

베를린 미테 지구에서 확고한 존재감과 커피맛으로 단연 으뜸에 꼽히는 카페 FATHER CARPENTER는 미테 쇼핑지구 번화가에 있다. 여정 중 늦은 오후 어느 즈음 한템포 쉼을 가지기에 매우 제격인 곳이다. 커피 못지 않게 브런치로도 로컬들에게 애정을 듬뿍 받는 곳이라고 한다. 건물들이 모여 만들어진 중정에 카페의 노천 좌석이 마련돼 있는데, 그 풍경이 뜻밖에도 목가적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심호흡을 하게 되고, 쉼을 가지게 되는 곳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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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플랫 화이트나 라떼가 아닌 블랙 커피를 주문한 건 두세번 미만이었던 듯싶다.

이 곳에선 직접 브루잉하는 신선한 원두가 워낙 자랑이란 소문에 마법에 가까운 우유의 실키함을 포기하고 커피 본연의 맛을 선택했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고, 피로한 몸을 깨우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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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발견한 또 하나의 동물 친구. 아니 바라볼 수 없었다.

이 덩치 큰 녀석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주인과 그의 친구가 브런치를 끝낼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이 친구의 인내심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이 이 친구를 바라보던 기특해 마다 않던 애정어린 눈빛들도 기억한다. 커피 한 모금, 이녀석 힐끗 바라보기를 몇 차례 반복하니 피로가 풀리는 듯했던 그 순간의 즐거움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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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메뉴에선 당근 케익이 단연 시그너처 메뉴로 베를리너들이 애정한다 하여 주저없이 주문했다.

산미가 강하지 않은, 적당한 바디감과 적당한 쓴 맛 그리고 (역시나) 부드러운 목넘김과 마시기에 지극히 적당한 '온도'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적당함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매우 유감이지만, 궁극의 적당함을 만들어낸 이들에게 더 경탄해 마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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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모금을 들이킬 때마다 베를린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라고 하면 과한 표현이 되려나.

어떻게 하면 나도... 나만의 고유의 생각과 마음을,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베를린, 이 도시처럼, 이 커피처럼 분명한 색깔을 띠고 매력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베를린 여행 후 돌아온 일상에서 '우리, 커피나 한 잔 할까?'란 한 마디에 리듬감이 실린 듯하다.

무미건조하게 툭 건네곤 했던 습관과도 다름 없던 이 한마디가 자꾸만 베를린을 추억하게 해주는 덕분일까.

커피가 마치 도시를 묘사해주는 듯한 베를린 커피씬의 묘한 매력이 자주 그립다.


다시 베를린을 찾게 될 때에도 커피 순례는 단연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카페로, 커피로, 베를린을 먼저 만난다면 더 깊이 이 도시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 커피, 지극히 베를린스러웠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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