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를 마쳤지만 회사에 남기로 한다.
오늘은 늦은밤 요가를 가야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게으름에 굴복하고만 싶어질 것 같아 고요해진 (회사) 공간에서 뭐라도 끄적여보고 싶어서다.
갑자기 꺼내보게 된 파리에서 읽었던 책 'A Moveable Feast'에서의 헤밍웨이의 말. 일기도 제대로 못쓰는 내 주제에 정말 감히 하는 인용이지만... 걱정하지 말란다. 언제나 써왔고, 지금도 쓸 것이니까. 단 한 문장이라도 진솔하게 쓰면 되니까.
그렇다. 나도 그래야 한다.
뭐라도 써야한다. 스스로 그리고 많은 이들과 약속했으니까.
태풍 소식에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염려도 되지만 이제 사흘남은 여행을 향한 설렘에 비길 바가 아니다.
요며칠 신경쓸 게 많은 프로젝트와 휴가를 가있음에도(미국) 옆에 있는 것처럼 카톡을 해대시는 상사의 긴밀한 소통(?) 덕분에 스트레스도 적잖다. 안마주치고 휴가갈 수 있었는데 이틀이나 앞당겨 돌아온다는 소식을전하는 기염을 토해내는 능력자 그녀.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자. 이것도 전략이다. 빠르게 받아들이고, 신속히 여행 준비로 몰입하는거다. 내 마음속과 머리속을 그녀로 채울 수 없다. 벗어나자!
마제소바로 점심을 맛깔나게 먹고 뜨거운 태양 벗삼아 걸음 걸음 옮겨 테라로사로 커피를 마시러 향했더랬다.
어쩌다 보니 인턴과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오늘도 내 여행 준비 스토리에 희생양이 돼 버린 그녀가 조금 가여웠지만(^^;), 너무나 신나게 들어주는 모습에 내가 더 반해버리는 역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해외에서 수 년간 살아왔고, 여행을 무척 좋아해 많은 나라로 발길 닿았다고 하는 그녀의 스토리도 흥미진진해 우리는 갈증 유발 수준의 수다를 너나 할 것 없이 떨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 어느즈음에 한 상사가 스치듯 건네었던 말 한마디가 있었는데, '유난스럽게도 준비한다, 여행'이었다. 표정과 어조로 봐선 욕같진 않았지만 썩 유쾌하지도 않았기에 아리송했던 순간이었다. 당연히 알 게 뭐야, 무슨 상관?의 뉘앙스로 그 상황을 넘겼지만, 내심 생각케 되었는데,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란 생각 말이다.
어제도 퇴근길 '빈의 동네 책방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 '어느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를 샀다. 서서히 읽기 시작해 비행기에서 마무리하기 위해서인데, 회사 책상 위에 올려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눈빛이 겸연쩍어졌다. 다시 떠오른 생각, '내가 너무 유난떨어?' 때문이다. 식사 자리에서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아 좋겠다, 란 말들을 종종 건네오니 화답하는 말로 준비 과정을 짧게 공유했던 것인데 너무 아무생각이 없었나싶기도 하니 이거 원 내가 왜이러고있나 싶어져서 마음이 씩씩거려졌다. 원 모얼 타임, 알 게 뭐람?
어여쁜 핑크색의 실크 블라우스도 하나 장만했다. 이미 가을이 와있다는 비엔나에 가서 입으면 예쁠 것 같아서. 고맙게도 걷고 걷고 또 걸을 내게 필요한 쿠션감 빵빵한 스니커즈도 선물 받았다. 설렘 증폭, 준비만족감 폭발. 그런데 순간 '또!' 쓸데없는 생각이 또아리를 트는거다(유난 어쩌구 저쩌구). 이번엔 의식적으로 그 생각들을 물리쳐버렸다.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평정심을 갖기 위해(핑계는 끝이 없다^^) 스윗한 바닐라 라떼를 마셔야겠다.
별로 누군가의 말에 신경쓰지 않고 또는 영향받지 않고 살아가는 나라고 자부(생각)해왔던 세월이 적잖은데 매일 보는 회사의 상사가 건넨 한 마디에 마음 어딘가가 긁혔던 모양이다. 나라고 별 수 없나 싶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걸까 싶기도 하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 싶기도 하다. 아무렴 어때, 라는 게 결론이지만.
유난스러운 준비를 마저 하기 위해 이제 퇴근을 해야겠다.
책도 읽고, 요가도 하고, 트렁크도 열고, 파우치도 꺼내야겠다.
유난 떤 만큼 풍요로워질 여행을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