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여성을 위해 일한다
*본 게시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주인공 슬로운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미국의 이슈 총기 규제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단지 슬로운이 맡은 로비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영화를 다 보기까지 작품 속 인물들이 슬로운의 작전과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관객 또한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승리를 얻어낼 것이라고 직감한다. 슬로운을 연기한 제시카 차스테인은 완벽한 로비스트의 캐릭터를 선보이며 작품 속으로 순식간에 매료시킨다. 대체 불가한 그의 연기는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빼놓을 수 없는 필모그래피를 완성했다.
차단된 스테레오 타입
슬로운은 미국 정치계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한 로비스트이다. 대형 로비 회사에서 11년 동안 커리어를 쌓으며, 아무도 그를 실력으로 깎아내릴 수 없는 사회적 입지를 다졌다. 그는 철두철미하고 이성적이며 승률을 위해 뛰어난 판단력을 발휘한다.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클라이언트와 회사 대표는 슬로운에게 총기 규제 법안인 ‘히튼-해리스’를 막아달라는 제안을 한다. 클라이언트는 ‘총으로 자식을 지키고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맞서는 엄마’의 이미지를 만들어 지지율이 낮은 여성의 표를 얻어내자고 말한다. 여성의 피해를 이용해 선두로 내세운 후, 자신은 뒤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노골적인 계획을 능청스레 이야기한다. 슬로운은 그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여자들을 총기 로비에 끌어들이기 위해 핑크색 포장지를 씌우라니.” 말도 안 되는 그의 의도를 간파하며 제안을 거절한다. 대표는 그에게 ‘히튼-해리스’ 법안을 막을 수 없다면 회사를 나가라고 소리친다. 슬로운은 대표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움직인다. 회사를 나와 ‘히튼-해리스’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싸우는 캠페인으로 간다.
작품은 슬로운에게 신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를 감정적이거나 정의만을 쫓는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성공을 위해서 누구보다 앞장서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만 여성을 이용하려는 유치한 작당에는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원천 차단해버린다. 11년의 커리어를 한 번에 져버리는 그의 판단에 대해 사람들은 총기사건의 피해자를 알고 있냐고 묻는다. 슬로운은 그저 나의 의견이고, 개인적인 영향을 받아야만 의견에 힘이 실리는 것이 아니라고 대응한다. 작품은 여성의 행동에 개인적인 서사나 이유를 나열했던 기존 매체들과 맞선다.
남성 캐릭터들의 위치
슬로운이 브래디 캠페인으로 옮겨 가며 조직된 팀원들의 구성은 흥미롭다. 팀의 리더 슬로운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과 성별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무능력한 남성 캐릭터의 모습과 슬로운이 여성 캐릭터를 이끄는 구조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이윤과 인맥에만 눈이 먼 남성 캐릭터들을 보여준다. 슬로운이 브래디 캠페인으로 가고 난 후, 슬로운을 따라가지 않은 직원들과 회사 대표, 클라이언트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다. 클라이언트가 메뉴판을 보며 ‘아미수 치킨’이 무엇이냐는 말에 남성들은 동문서답을 한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라는 슬로운의 말처럼 그들은 통찰력 없이 로비스트로서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한다. 그저 클라이언트의 입맛 맞추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그들이 패배할 것이라는 암시를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감정을 중요시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은 슈미트이다. 슈미트는 브래디 캠페인의 CEO이며 슬로운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사람이다. 그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모으는 슬로운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슬로운의 잘잘못을 따지는 청문회에서도 슬로운을 감싸기 위해 위증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 팀원이자 총기 사건의 피해자인 에스미를 끌어들인 슬로운의 작전을 비난한다.
이렇듯 작품은 남성 중심 서사에서 선보이던 ‘남성은 이성적,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뿐하게 뒤집는다. 또한 일의 능률보다는 ‘사회생활’이라고 일컫는 행위들을 우선시하는 남성들의 문화를 꼬집는다.
여성은 여성을 위해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후 대책을 강구해야 하죠. 승자는 상대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회심의 한 방을 상대보다 먼저 날려야 해요.” <미스 슬로운>은 슬로운이 정면을 응시하면서 앞의 이야기를 읊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시퀀스는 슬로운이 본인의 청문회를 위해 변호사와 답변을 준비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슬로운의 시선이 스크린을 넘어 관객을 바라보게 하는 연출은 주인공에게 단숨에 몰입하게 만든다. 슬로운의 말은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지친 그의 눈빛에 궁금증을 자아낸다.
<미스 슬로운>은 총기 규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으로서 로비스트로서 살아가는 슬로운의 삶을 다룬 영화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슬로운은 자신을 무기로 사용하여 완승을 거둔다. 이전 회사에 자신의 부정행위 증거를 일부러 남겨 놓고, 슬로운의 숨겨진 정보원이었던 제인을 통해 증거를 빌미로 청문회를 열게 한 것이다. 작품 초반부에 슬로운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소크라테스를 사람들이 어떻게 아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인에게 던진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주변 인물들의 기록으로 남겨진 것처럼, 슬로운의 승리에는 제인의 협조가 뒤받쳐질 것이라는 예감을 심어준다.
어떠한 동요도 없는 슬로운의 표정을 보며 과연 어디서부터가 그의 설계였는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작품 초반부터 슬로운이 약을 복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가 계속 먹었던 약은 정신자극제였고, 더 오래 깨어 있기 위해 섭취한 것이다. 모든 것을 통찰하고 끊임없이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그에게 시간은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턱없이 모자란 수면은 그의 건강을 악화시킨다. 후반부에서 변호사는 감옥에 구속된 슬로운의 면회에서, 총기 규제가 자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었냐고 묻는다. 슬로운은 “일 때문에 자살하기 직전이라면 경력을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라고 답한다. 그의 답변을 들으면, 과열된 자신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를 허물 계획을 세운 것인가 생각에 잠긴다. 슬로운은 머릿속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원 바깥으로 더욱 커다란 원을 그리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전무후무한 로비스트의 캐릭터를 완성한다.
<미스 슬로운>은 주인공 슬로운을 통해 리더의 모습을 새롭게 제시한다. 또한 승리와 개인적인 신념 앞에 변명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자신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신념이 무엇이고 그가 이뤄낸 책임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기획·글/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