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pe of Water>

2017 / dir. Guillermo del Toro

by Werther

영화 세계의 소수자 조명을 향한 발걸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렁차진다. 퀴어 영화는 이미 꾸준히 나오고 있고,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 2016>와 같은 대담한 페미니즘 영화는 물론이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벌써 수년 전에 <님포매니악, 2013>이라는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성 소수자를 그려냈음은 물론, <패딩턴, 2014>으로 다문화 사회을 담아내고, <블랙 팬서, 2018>는 이제 흑인을 히어로로 세워 역사적인 인기를 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상에, “괴물”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는 그 사람 일라이자는 농아로서, 소수자의 대표격인 장애인이다. 그의 이웃은 게이이며, 직장동료는 흑인 여성이고, 조력자 중 하나인 디미트리는 어찌 보면 다문화 사회의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이가 일라이자와 “괴물”의 사랑을 위한 조력자로서 행위하고, 반대편에 있는 헤테로섹슈얼 백인 남성 기득권층은 그 과정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앞서 계속 “괴물”이라 칭하고 있는 이 생명체는 어찌하여 괴물로 불리우는가.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며 이성적인 생각을 일부 할 수 있고, 직립보행 능력이 있다. 반면 물속에서 일정 시간 생활해야 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고양이를 잡아먹는 등의 야생성이 남아있고, 무엇보다도 겉으로 보기에 누가 봐도 비늘과 아가미가 달린 괴물, 인간도 짐승도 아닌 괴물이다. 이런 괴물과 사랑에 빠지는 여성이라니. “나도 그처럼 말 못 하고 입만 뻥긋뻥긋하는데,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라고 외치는 일라이자는 (물론 눈물은 찔끔했지만) 너무 뻔한 대사를 쳤다. 그런 사랑을 위해 온갖 소수자가 안티테제에 대항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치는 모양이라니, 뻔해도 너무 뻔하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뻔함을 풀어내는 게 아주 간드러진다.


이 영화에 있어서 제목에서 한 번 더 강조하는 “물”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음악감독의 노스탤지어적인 도입부 음악과 함께 영화 전반적 분위기를 조각한다. 우중충한 녹색빛 디스토피아적 물의 도시를 바라보는데, 우리 마음은 무겁지 않다. 만족스럽게 일상을 즐기는 일라이자의 행복한 표정 덕분인지도 모른다.


녹색은 디스토피아의 일상적 삶에 찌들어 있는 빛이다. 영화 전반에 깔린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기예르모 감독의 전매특허인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는데,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앞다투어 우주탐험의 꿈을 키우는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이 “미래를 좇는 자들”의 공간인 연구소는 온통 녹색으로 치장되어있다. 영화 포스터를 그리는 자일스도 영화사에서 빨간색을 초록색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받는다.


녹색 동화 속에 반기를 들고 휘황찬란히 물감을 뿌려대는 것이 빨간색이다. 스트릭랜드에 대한 투쟁으로 “괴물”이 실험실에 피를 흩뿌려놓는다. 일라이자의 옷이며 머리띠와 구두까지 점점 붉어져가는 스크린에는, 암울한 세계에 대한 기예르모의 저항이 비친다. 중력을 거스르며 한없이 지구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그 경쟁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것, 소련에 의해 우주로 버려지는 개와 희생되는 수많은 다른 “괴물”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임이 분명하다.


물은 그 시도들에 반하여 하염없이 중력에 순응한다. 일라이자의 욕실을 가득 채운 물은 1층의 영화관에까지 넘쳐 적시고, 어느 날 우리의 괴물은 집에서 벗어나 붉은색 흔적을 남기며 1층의 영화관으로 내려간다. 우주의 순리를 따르는 자연에 대한 기예르모의 찬가로도 보인다. 우주를 되려 탐험하고 정복하려는 때에 맞추어 나타난 아마존의 고대 생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어쩌면 그것을 신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것이며 사라진 유토피아를 되찾기 위한 이들의 투쟁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의 웨스 앤더슨 방식이 지나간 세월을 담배 한 대 앗아 물고 추억하며 그 시절을 기리는 것이라면,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위한 끝없는 싸움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올해의 베드씬이라고 칭한 버스에서의 물방울 씬에서, 일라이자가 수줍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볼 때, 두 물방울이 서로 춤을 추듯 움직이다 합하여 하나가 되어버린다. 앞으로 나아가는 버스에 반하여 공기 때문에 뒤로 밀려가는 물방울들은 작금에 저항하는 우리의 말 못 하는 두 인물을 상징할 수밖에 없다. 간헐적으로 비치는 붉은 네온사인 빛깔과 유리창 뒤쪽으로 보이는 일라이자의 붉은 머리띠가 인상적이다.


또 하나의 과거에 대한 함성은 일라이자의 노랫말이다. 아마도 2018년의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가 아닐까 싶은, 유일하게 샐리 호킨스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백 장면이 그것인데, 흑백 화면에서 쏟아진다. 흑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스크린 산업을 반추함에 더하여 말 못 하는 두 인물이 주인공임으로 비추어 보아 뭇 영화인들의 무성영화에의 추억을 보듬어주는 것 같다. 이전에 자일스와 일라이자가 쇼파에 앉아 TV를 통하여 옛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며 탭댄스를 춘다. <라라랜드, 2016>의 “A Lovely Night”가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 1952>를 반추하듯, 지난 시절의 아름답던 뮤지컬 영화 시대를 돌이켜보는 듯하다.


그것이 기예르모의 예술관이다. 자일스의 예술인 포스터에 트집 잡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벽에 맞서는 것이다. 디미트리를 향해 “미래를 좇는 자들”은 “과학자들은 예술가와 같아서 실험체들과 사랑에 빠진다”라고 내뱉는다. 반대편에 있는 과거를 좇는 사람들은 모두 과학자이자 예술가이다. 일라이자도 자일스도, 혹은 젤다와 디미트리까지도. 그리고 “괴물”, 혹은 자연이나 물, 또는 과거는, 예술 그 자체이다.


일라이자가 처음으로 뜯어내는 달력 조각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흐르는 강물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라이자는 예술을 끌어안고서, 중력을 거슬러 우주로 나아가려는 자들에게 엿먹이듯이 그 강물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빨간 하이힐과 빨간 드레스를 입은 채로.


사견으로는 서사 속에 담긴 내용이 무언가는 기예르모의 영화를 즐기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특수효과팀에서부터 영화인의 싹을 튼 우리의 성공한 덕후 기예르모 감독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지 보시라. 어느 누가 비늘 달린 괴물을 이토록 환상적으로 조각할 수 있겠는가. 이 특별할 것 없는 플롯을 특별하게 보여주는 능력은 이 세상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다.


샐리 호킨스라는 배우가 눈에 띈다. 물이라는 매개로 <패딩턴 2, 2017>에서, 그리고 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보여주는 소수자 인권 노선은 가히 인상적이다. <패딩턴 2>에서 메리 아줌마가 물에 빠진 패딩턴과 수중에서 눈을 마주치는 무언의 몇 초로부터 느꼈던 기시감은 <셰이프 오브 워터> 덕분이었다. 작은 곰탱이가 비늘 달린 괴물로 바뀌었을 뿐, 그가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하다. 아무 말도 없이, 물속에서, 지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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