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 dir. Sean Baker
(<시스터, 2012>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환상적인 보랏빛 아파트에 무지개가 걸려있는 아름다운 배경이 돋보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 그 귀여운 행복감은 텍스트를 통해서는 오롯이 전할 수 없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렛 미 인, 2008>,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 2012>,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2015>을 이은 또 하나의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말괄량이 무니와 단짝 스쿠티,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 젠시와 함께 두려울 것 없는 이 쪼끄만 아이들은 이 작은 사회를 그들만의 세계로 재창조해간다.
“Moonee~ Scooty~,” “Why~”의 반복으로 시작되는 이 간지러운 오프닝 시퀀스는 “새 차가 생겼어!”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어른들의 권태로운 이벤트 하나하나에 싱그러운 웃음으로써 의미를 부여하는 아이들의 시선은 관객의 심장에 낡아 있는 동심이라는 두 글자를 선명히 한다. 젠시를 불러내기 위해 “Whaddaya play?”에 “Just Play!”로 대답하는 무니의 진심 어린 내뱉음은 그들이 살아감에 있어 특별하지 않은 모든 것이 특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 어른들에겐 별 볼 일 없는 일들이 모텔 전체에 정전을 일으키고 폐 콘도에 불을 지피니 큰일이긴 하다.
트워킹을 추며 누가 더 잘 추는지 내기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동정을 구걸하며, 빵 차 앞에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새치기해 빵을 얻어먹고, 아파트 전 구역을 휘저어 다니는 그들의 일상은 다분히도 일상적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일상은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 2016>의 일상과는 달리 그 자체로 중심점을 지녀 변주하지도 않고, 관객에게 특별한 의미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일상들이 관객의 뇌리에 쌓이고 쌓여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일상 속에 껴들도록 만든다. 아이들의 시간을 가만히 관조하고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매직 캐슬”에 시나브로 녹아들도록 허락한다. 헬리콥터가 날아갈 때 시원하게 엿을 먹이는 것을, 션 베이커는 어떤 방식을 통해 상징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 시간은 단지 그 시간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플로리다의 일상을 체험하고 그들의 세계에 점점 익숙해질 뿐이다. 마치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의 세계처럼.
그런 가운데도 션 베이커만의 상징은 존재한다. 쓰러져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넘어졌어도 자라기 때문에 좋아하는 나무라던 그들, ‘매직 캐슬’ 위에 절묘하게 떠 있는 무지개를 보며 아래의 황금을 찾아 카메라를 등지고 달려가던 그들, 그들의 화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징물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들이야말로 지금까지 흘러왔던 일상 대신에 반복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들임에도 결국 “일상”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관객을 설득하는 대신에 보랏빛 세계 한켠에 편히 앉아 그들의 세상을 체험하게 하도록 안락한 의자 하나를 가져다준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시선처럼.
션 베이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제목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제목이었다고 한다. 이는 디즈니사에서 디즈니월드를 1967년 즈음에 처음 만들 때 붙였던 프로젝트 이름이며, 지금은 홈리스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의 단어란다. 션 베이커가 조명하는 인물들은 특별하다.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 2008>에서는 불법체류자를, <탠저린, 2015>에서는 트랜스젠더, 우리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홈리스를 관조한다. 모두가 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잿빛으로 찌들어가는 삶을 어영부영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 세계를 재창조하기 위하여 선택한 이번 영화에서 잿빛 인생의 대표는 미혼모와 사생아들이다.
포스터부터 느껴지겠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전혀 잿빛이 아니다. 다르덴 형제의 그것과 닮아있는 핸드헬드로 담아내는 세계, 온통 분홍빛,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세계는 무니와 젠시의 시선에서 무지개와 쓰러진 나무가 뜻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아이들은 홈리스의 임시 거주처인 ‘매직 캐슬’라는 공간을 그들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놀이터로 재창조하고, 관객은 색깔 자체를 바꾸는 그 어린 시선의 힘에 가만히 앉아 감복할 수밖에 없다. 어른들의 잿빛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마지막 시퀀스의 붉은 질주는, 기예르모의 <판의 미로, 2006>의 그것과 닮아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찾아내는 유일무이한 아이들의 강력한 능력은 어느 어른도 가질 수 없다. 아이들아, 쓰러져도 앞으로 나아가거라, 디즈니랜드로 우렁차게 달려가거라.
미혼모와 사생아의 삶은 어찌 잿빛으로 물들었는가. 아이를 뱃속에서 키우는 이는 결국엔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가 가진 아이라는 이유로, 저 슬픈 두 단어를 평생토록 이마에 달고 다녀야 하는 슬픈 생은, 무니를 포함한 친구 대부분이 안고 살아간다. 젊은 엄마와 사는 무니와 스쿠티, 그리고 엄마가 15살 때 “사고쳐” 생긴 젠시까지. 분홍빛 세계에서도 무니든 젠시든 결국에는 자신들 어머니의 전철을 밟을 거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때 타며 잿빛으로 변할 거라는, 벗어날 수 없는 폐곡선을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공교롭게도 남자아이들은 점차 영화에서 제외되어 종지에는 무니와 젠시만이 남는다. 처음부터 함께하던 디키와 스쿠티는 부모에 의해 무니의 세계에서 멀어지게 된다. 두 여자아이가 손을 움켜쥐고 디즈니랜드로 성큼성큼 달려가는 발걸음은 음악에 어울려 강렬하다 못해 우렁차다.
잿빛 굴레 속에서 인물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은 <시스터, 2012>의 아이 시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죄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다. 시몽은 철부지 엄마와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콘도에서 스키용품을 훔쳐 되판 돈으로 죽지 못하여 살아간다. <시스터>의 카메라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의 불법에 대하여 질책과 힐난의 여지를 삼키고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핼리는, 그와 무니 두 사람의 생활 영위를 위해 향수를 되팖은 물론이요 타인의 물건을 훔치고 아이가 있는 방에 성매수남까지 들이기 시작한다. 법을 차치하고도 도덕적으로 바라본다 해도 옳지 못한 방식, 그 방식으로라도 살아남으려는 그들에 우리는 어떤 시선을 보내야 할까. 경찰을 향해 “Fuck You”를 외치는 핼리와 아동관리국 직원으로부터 도망치는 무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여전히 성판매 여성은 죄인인가.
무명 배우들 가운데서 무게 중심을 든든히 지키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빛나는 빌렘 대포. 히치콕의 <이창, 1954>을 방불케 하는 수영장 씬에서 글로리아와 티격태격하는 그의 시니컬한 표정이 여전히 머리에 맴돈다. 가장 입체적인 인물인 바비를 맡은 그는, 때로는 아이들이고 뭐고 만사 귀찮은 돈만 밝히는 속물이면서, 자신의 일터에서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을 숨겨주고, 소아성애자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면서, 동시에 그들 가족의 생활 영위를 돕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일련의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핼리로부터 무니를 앗아가는 아동관리국 직원들에게 이렇다 할 저항 하나 못하고 담배 한 까치 물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는, 이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와 어딘가 닮아있다.
우리가 이렇게 영화를 찾아보는 이유는, 바로 무니가 되기 위함이 아닐까.
찌든 삶의 모텔을 보랏빛 “매직 캐슬”로 바라보고, 홀연히 디즈니랜드로 달려가고픈 욕심을 위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