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 dir. Michael Haneke
이자벨 위뻬르의 연기는 살을 엔다.
가슴팍 깊숙한 곳 쉬이 느껴지지 않는 어딘가를 뭉툭한 송곳으로 쿡쿡 찔러대는 것 같다. 갑갑한 영화 속 세계에서 먼지투성이 현실을 무기력하게 들이마시고 있는 그녀의 주름 하나하나가 연출이며 미장센으로 살아 연기한다. 출연하는 영화가 어떤 것이든 그 장르에 본인의 이름을 갖다 붙여도 무색할 만큼 그녀의 분위기는 영화를 잡아먹는다. <피아니스트>도 다르지 않다.
모성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당위성을 딸에게 강요하는 에리카의 어머니, 이는 계급 권력의 변형이요, 어미라는 탈을 쓴 권위에 해당한다. 권위에 짓눌려 교양이라는 허물로써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권위의 대물림으로 교수라는 또다른 권위의 소유자가 탄생한다. 어딘가 시퍼런 멍을 가진 권력, 병든 권위자로서 에리카는 미디엄 쇼트로써의 카메라 정중앙에 있던 적이 없다. 권위를 비껴간 권력자랄까, 계급은 무슨 질투심에 불타올라 제자의 코트 주머니에 유리조각을 넣어두는 권위적이지 못한 짓까지 일삼는다. 엄마 등쌀에 자신과 똑같은 피아니스트의 멍에를 달 준비하는 제자가 안타까워서일까.
발테르의 연주를 지켜보는 에리카의 흔들리는 표정은 영화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인다. 발테르의 얼굴, 에리카의 갈 곳 잃은 눈동자, 피아노를 치는 두 손, 그리고 에리카의 떨리는 입술의 연속된 쇼트들 사이에서, 권위의 대상과 욕구의 대상은 합치되면서 팽팽히 대치한다. 피아노가 흐르는 가운데의 감정선, 표정, 분위기의 변화는 음악이 갖는 시간 예술로서의 백미를 확실히 뽑아낸다.
권위의 대상으로서의 발테르는 여자 화장실, 남성을 다 벗겨내는 수치의 공간에서, 에리카의 뜻대로 핸드잡을 당하고, 블로우잡을 당한다. 그의 의지는 상실되어 소멸한 지 오래다. 백색 권위의 공간에서 한 발짝 벗어나자마자 망측한 뜀걸음으로 “귀여운 아가씨”라는 역겨운 언사와 함께 남근 권력을 과시한다.
편지, 발화를 통하기에는 부끄럽기에 빌린 수줍은 매개를 통해, 자신의 치부, 마조히즘적 욕망을 발테르에게 전한다. 자신의 방에서 엄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꼬옥 막은 채, 엄마가 듣든 말든 자신을 때려달라고 “명령”한다. 어머니로부터의 억압이 왜곡된 욕구로 응고되어버린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발테르는, 훗날 하키 창고에서의 관계에서는, 완벽하게 남성우월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여자 화장실에서는 절대적으로 발테르의 표정을 잡던 카메라가, 이번에는 블로우잡 “당하는” 에리카의 표정만을 잡는다.
그 권력 구조 전복의 결과물로써 구토로 회답하는 그녀는, 집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반항하지 못하게 위에서 짓누르며 연신 “Je t’aime”를 외치는데, 신체적 약자로 향하는 권위의 방출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에서 에리카, 그리고 발테르로 이어지는 계급 권력이, 발테르에서 에리카, 그리고 어머니로 역전되어 신체적인 힘으로 대변되는 젠더 권력이 발현된다.
어머니의 집, 레슨실, 피아노 앞이라는 공간에서 이제 그녀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슬픈 결의, 아이러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에서 퍼져나가는 피, 그 검붉은 투쟁을 실천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 자의로 흘려본 적 없는 피, 엄마한테 생리한다는 걸 증명키 위해 흘렸던 피, 마조히즘의 왜곡된 해석으로 발테르로부터 얼룩진 피, 이제는 홀로 피를 흘릴 차례다. 그녀는 이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