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 dir. Paul Thomas Anderson
2018 아카데미 의상상을 독차지할 정도로 아름다운 드레스가 그윽한 <팬텀 스레드>는 드레스에 담긴 수많은 독기만큼이나 로맨스의 품 아래 악취를 스멀스멀 풍기는 지독함을 감추고 있다.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가 없는 두 인물을 겉도는 긴장감은 독이 발린 세사를 반대 방향으로 당기며 먼저 놓칠세라 서로 계속해서 손에 몇 바퀴씩 칭칭 감아대는 모양이다. 손에서 피가 나거나 먼저 앞으로 무너지는 건 누굴지 혹은 이에 못 이겨 실이 먼저 끊어질지 감상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팬텀 스레드>의 서사는 영화 전체 시간상 가장 최근 시점에 알마가 불특정 누군가를 대상으로 자신과 레이놀즈의 삶을 반추하는 액자식 구성을 띠고 있다. 그 불특정 누군가였던 인물은 레이놀즈가 독버섯을 먹고 앓아누웠을 때 진료를 보러 온 의사임이 아주 유려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액자 바깥의 주인공은 알마이지만, 액자 안의 이야기가 시작됨은 레이놀즈로부터 시작한다. 이로부터 관객은 앞으로 일어날 두 인물의 만남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게 된다.
드레스 장인인 레이놀즈 우드콕에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는 삶을 살아가는 근원이자 일종의 저주이다. 어머니로 인하여 지금처럼 살아가고 어머니로 인하여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삶에 알마가 개입하게 된다. 첫만남부터 어딘가 살짝 부족해 보이고 모자란 사람처럼 배시시 웃기만 하는 그녀는 항상 완벽하고 어디서나 진중한 레이놀즈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모닝 키스에 고개도 돌리지 않는 레이놀즈와 특유의 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빵에 버터를 부산스럽게 바르는 그녀는 어딜 봐도 함께 살기 어려운 조합이다.
매일매일 고난의 나날을 보내는 알마가 유일하게 레이놀즈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때가 있다면 그가 고된 업무에 지쳐 에너지가 방전되었을 때이다. 그런 그의 상태를 알마는 아기 같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를 돌보는 알마의 표정은 마치 어머니처럼 인자하며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그가 마시는 차에 독버섯을 넣어 며칠 동안 손가락 까딱하기 힘든 병신으로 만들어버린다. 레이놀즈는 병상에 누워있을 때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환상을 보는데, 알마가 그 혼자 있던 방에 들어올 때까지 두 여인은 한 공간에 공존하다가, 레이놀즈의 아픈 얼굴을 담은 쇼트가 있고서, 어머니의 형상은 사라진다. 레이놀즈의 삶에 있어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알마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우드콕 가문을 점점 잠식해간다. 바바라 여사의 드레스를 도로 빼앗아 오라고 레이놀즈를 설득하는 한편, 레이놀즈가 앓아누웠을 때는 그의 누나인 시릴 우드콕과 결정권을 두고 대립한다. 의사에게 진찰을 맡길지를 두고 갈등하고, 의사를 배웅할 때에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동시에 똑같은 대답을 내뱉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이벤트를 해주고 싶다며 알마는 시릴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집에서 내쫓는다. 이러한 집안의 권위 전복에 역시나 레이놀즈는 당황하고 곧바로 시릴의 행방을 묻는다.
레이놀즈는 다분히 남성주의적이고 권위적임에도 이제는 주변의 여성들이 없으면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독버섯을 먹고 쓰러졌을 때도 그의 안위보다는 드레스가 먼저 걱정되는 재단사들을 보라. 그녀들은 이제 레이놀즈가 없어도 홀로 척척 나머지 작업을 완료한다. 아무리 레이놀즈가 그 드레스를 보고 못생겼다 혹평했어도 말이다. 그의 남근중심 권력은 여성들에 의해 잠식되어간다. 사실 종전부터 어머니라는 존재에 지배당하는 그였지만.
그에게 어머니가 갖는 영향력은 그가 캔버스 천 속에 새긴 것에서 나온다. 당신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는 알마의 물음에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이 속에 있다는 그는, 직접 만드는 드레스에도 천조각을 덧대어 자신의 속내, 비밀을 숨긴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질주하는 때에 알마가 그의 드레스 속에서 떼어낸 천조각에 쓰인 문구 “Never Cursed”에는 저주로서의 어머니로부터 발버둥치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으면서도, 그것을 평생토록 달고 다니며 또다시 저주로서의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행위 자체가 그에게 똑같은 저주를 부여한 것이다.
앓아누울 때 어머니의 형상과 알마가 교차하였던 것처럼, 이제 그녀는 완벽하게 그에 있어서 어머니의 자리를 대체한다. 그는 그녀가 집안과 그의 업무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다. 그녀가 신년 파티에 가버리자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다 결국에는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데리고 오는 정성을 보라. 종지에 한 번 더 독버섯을 먹이려는 그녀의 시도에 물리적 반항 없이 순순히 따르는 그는, 어머니의 저주를 대체해줄 것을 바라는 안락으로의 욕구 때문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Never Cursed” 조각을 떼어버리고 온전히 우드콕 집안의 우두머리로 군림한다. 그런 그녀는 그에게 구원일까 새로운 저주일까. 독버섯을 순순히 먹던 순간의 쇼트에서 그가 들고 있는 포크가 그녀를 향하고 있던 것은 우연일까.
PTA가 알마라는 인간형을 이용하여 여성에 대하여 던지고 싶은 감성이 여기에 있다. 두 인간형이 처음 만났던 날부터 화장 지운 얼굴이 더 예쁘다며 외모에 대한 평가를 던지는 것은 물론이요, 드레스와 수치를 들이대가며 몸매를 재단하고, 그의 누나 시릴은 만난지 1분도 채 안 되어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평가한다. 애초에 드레스라는 존재 자체가 여성을 이상적인 몸매에 옭아매는 수단임에, 그의 미소지니적 성격에 숟가락을 얹어주는 것은 자명하다. 이후에 같이 살며 버섯따기나 요리, 차대접 등의 잡일은 모두 알마가 도맡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그러나 PTA는 그렇다고 알마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녀 또한 드레스를 입은 바바라를 보고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 평가하며, 자신이 행하던 “여성적”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등 미소지니의 재생산에 일조하고 있다. 관계를 뻔한 방법으로 역전시켜 허구적 가상 현실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방법을 피함으로써 개연성을 부여하는데, 그 끝에는 부조리한 관계를 이용해먹는 알마가 있다. 요리해서 남편에게 갖다 바치는 그녀의 지위 덕에 레이놀즈에 독버섯을 먹일 수 있었고, 그의 부인이기에 시릴과 모든 하인을 집 밖으로 내쫓을 수 있었다.
여성을 일종의 액세서리로만 여기던 그는 여성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드레스 만드는 일조차 재단사 여성들에게 차지되고, 어머니라는 저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결국에는 알마라는 새로운 저주이다.
피아노 선율과 곳곳에 껴있는 바이올린 패밀리의 단계적 협연은 영화에 있어서 음악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라디오헤드 소속 조니 그린우드 음악 감독의 “House of Woodcock”은 극장에서 나오는 길을 머릿속에서 끝까지 장식해준다. 시종일관 배시시 웃던 알마의 표정과 짜증 가득한 레이놀즈의 주름이 선율에 가미되어 이 독한 영화에 대한 기억을 오래도록 유지하게 해준다. 마치 머릿속까지 독 바른 실이 묶여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