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 dir. ゆあさまさあき
술 한잔 크게 들이켜고픈 밤이다.
청계천 길바닥에서 사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그걸 안주 삼아 기다란 캔맥주 한 세 캔 정도 마시다가 근처 바로 들어가 위스키 샷으로 나를 끝낼 때까지 마시고프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런 아니메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2017>가 그의 어린 마음을 죄다 풀어내어 즐겼다면, 이것은 어른의 마음으로써 인생을 논한다. 아, 아직도 술 마시고 싶다.
작중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 흑발의 아가씨(이 표현이 달갑진 않지만 乙女의 번역 중 가장 덜 노골적이기에)는 첫 시퀀스에서부터 술을 들이켠다. 맥주로 시작하여 곧이어 술자리를 옮겨 칵테일을 마시다가,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는 연회에 들어가 위스키를 들이붓는다. 그래도 전혀 취하지 않는 그녀 대신에 정신없는 영화의 분위기에 관객들이 취한다. 술집 거리에 있는 내내 크고 작은 꽃잎들이 있는 듯 없는 듯 흩날리는 게 그 분위기 조성에 일조한다. 그래 이건 마치 술에 절어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결혼식의 술자리에서 시작해서, 어두컴컴한 바에서 만난 변태 아저씨(재패니메이션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미소지니는 고질병이다), 어쩌다 들어간 유학 송별회와 노인들의 인생을 한탄하는 술자리까지, 아가씨가 스치는 모든 장소가 술로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에 궤변춤이라는 요상한 춤을 모두가 같이 춤으로써 우리네가 종종 궤변을 늘어놓는 데에 따끔한 조소를 선사하고, 늙을수록 손목시계가 빨리 돌아간다며 인생의 부질없음을 논하는데, 마사아키 감독의 인생 철학들이 플롯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 굉장히 유려하다. 인상적인 점은 술자리라는 점 빼곤 연관성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이 부녀관계라든지 짝사랑 관계라든지 어떻게든 서로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마사아키 감독은 이 세상 모든 관계는 우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아가씨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불과하다. 그 흑발의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선배(역시나 이름이 없다)는 아가씨와의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우연을 가장하는 방법을 택한다. 허나 좀처럼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우연이 반복된다고 정도가 강해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우연에서 필연으로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아가씨가 음료수를 마시던 강가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앉아있던 수많은 커플이 인연이 되었던 연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마치 감기와 병문안과도 같다. 아가씨를 뺀 모든 작중 인물들이 감기에 걸린다. 그 감기의 시작은 제일 나이 들었던, 또는 제일 세상에 찌들었던 이백 영감으로부터 시작되어, 한 사람 한 사람 스쳐 가며 모두가 감기를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연은 산발적이다. 감기에 대해 아가씨는 모두에 개인적으로 병문안을 돌며 그들에게 엄마로부터 배운 달걀물을 만들어준다. 인연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인연은, “나보다는 그 사람에게 병문안 가보렴”이라는 말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감기에 걸린 이백 영감과 홀로 외로워하는 짝사랑 선배의 심정이 작중 공간인 교토 전체에 폭풍을 몰고 오는 비현실적인 상황은 유아사 마사아키의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을 말해준다. 인연은 병문안, 다른 말로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가씨와 선배가 헌책방을 가기 전에 커피 한 잔 하는 것, 딱 그정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자기만의 표시를 해둔 돈이 수많은 유통 과정 끝에 자신에게 돌아오는 우연과 헌책이 사고파는 행위 속에서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는 우연을 유추시킨다. 돈이라는 속물적인 것과 책이라는, 적어도 아가씨에게는, 어린 추억이 담긴 것 모두 우연의 철학을 감싸안고 있다. 돈은 이백 영감의 인생 풍파를 정통으로 맞은 허탈함을 말하고, 책은 작중 “라타타탐”이라는 그림책으로 대변되는 아가씨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말한다. 그 두 가지의 만남이 이백으로의 병문안이다. 덕분에 치료된 이백의 방에 있는 앞만 보고 질주하던 시계는, 불현듯 멈추더니 어느새 거꾸로 내달리고 있다. 이백의 짙푸르던 방은 붉은 기운을 머금고, 시들었던 수염도 생기를 되찾는다. 인연은 젊음이요, 이는 마사아키 감독이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 그렇게나 부르짖던 동심이다. 그렇게나 <인사이드 아웃, 2015>과 <토이스토리, 1995>를 오마주해대던 것도 모두 그 어림의 아름다움을 그려냄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술은 젊음인 것이다.
아가씨는 왜 그렇게 기차를 좋아했을까. 첫 시퀀스에서 먹던 달팽이요리가 기차의 바퀴로 오버랩되면서 경적이 들린다. 아울러 자판기 앞에서도, 꼬마 기관사 이야기 “라타타탐”을 떠올린 강가에서도 입술을 삐쭉 내밀며 기차 흉내를 낸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1999>에서처럼 기차로써 시간을 내달리기 위함일까. 아마 그 이유는 아가씨만 홀로 감기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젊으니까 술을 마시자. 그리고 걷자, 밤은 생각보다 짧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