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 dir. Greta Gerwig
<레이디버드>는 낭만의 영화다. 크리스틴 “레이디버드” 맥피어슨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 이 모든 현재에 신물이 나는 그녀가 꿈꾸는 모든 낭만을 이루어가는 영화다. 낡아빠진 집, 잔소리만 푹 찔러넣는 엄마와 실직한 아빠, 그들이 지어준 자신의 이름 크리스틴, 뚱뚱하고 못생긴 친구 쥴리, 그가 사는 철길 옆 구린 동네 새크라멘토까지. 그래서 그는 첫 남자친구 대니의 할머니 집인 커다란 파란 집을 자기 집이라 거짓말하고, 엄마에 반항한답시고 차에서 떨어져 깁스를 차고, 아빠가 부끄러워 학교 먼발치에 내려달라 말하고, 쥴리를 배신하여 다른 소위 “잘 나가는” 친구를 사귀고, 엄마 몰래 뉴욕의 대학교에 원서를 넣는다. 이 모든 것은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 레이디버드에 모두 응축되어 있다. 레이디버드는 낭만이다.
아니, 크리스틴에게 레이디버드는 “중2병”이다. 어린 낭만이 곪으면 중2병이 될까. 사회의 경제 체제에 가담하기 싫어 자급자족하겠다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카일에 홀딱 반해버린 레이디버드는 딱 거기까지가 적당했다. 낙태를 반대하는 강연자를 모욕하여 정학을 당하고(물론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하고 이 짓은 너무나 통쾌했다), 오랜 절친 쥴리를 잃고, 핑크빛 환상에 빠져있던 첫 성관계에 대한 낭만을 잃었다. 마치 부끄러움을 반추하는 듯하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 전 몸을 둥글게 말아 이불 안에라도 숨고 싶을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듯, 몹시 부끄럽고 온몸이 간질간질해 영화관 의자에서 괜스레 몸을 둥글게 말아 비틀고 싶은 그런 영화다. 레이디버드는 부끄러움이다.
우리는 부끄러움에 대하여 관대한가. 이불 속에서 과거의 우리에게 성을 내며 그때 왜 그랬냐며 자신을 미워하는가, 그땐 그랬지 하며 어린 아름다움으로 남겨두는가. 어머니는 레이디버드와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분이시다. 키워야 할 자식만 세 명인 집안에서 실직한 아버지 덕분에 가계 설계에 골치 터지는 중인 우리 어머니 마리안은 덕분에 레이디버드가 뉴욕 지역 대학교 원서 쓸 돈도 안 주시고, 작고 부끄러운 이 집에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런 어머니마저도, 자기 딸이 더 좋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지금의 모습이 제일 나을 순 없냐”고 반문하는 레이디버드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녀도 딸의 지금이 가장 아름다울 때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도 ‘레이디버드’였다.
딸이 뉴욕으로 떠날 때 몰래 흘리던 눈물방울과 이전까지 썼다 지웠다 종이를 구겼다 폈다 하며 수없이 만들어왔던 딸을 향한 속내의 편지들이 이를 방증한다. 대니와 사랑에 빠져 귀가한 레이디버드에 아버지의 실직을 고하며 역정을 내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정작 알콜 중독자 밑에서 자라온 본인은 얼마나 낭만에 휩싸여 낭만을 꿈꾸며 낭만에 닿고 싶어하며 살아왔을까. 보통 첫 섹스는 언제 하느냐고 묻는 딸을 귀엽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딸이 무진장 귀여우면서도 언제 이만큼 컸을까 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휩싸였겠지. 그런 그마저도 현실에 채여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딸에게 내뱉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이다지도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아버지는 레이디버드의 낭만을 지켜주려 애쓴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부끄러워 학교에서 멀리 내려달라는 걸 보고서도 모른 체해주고, 돈이 없어서 반대하는 부인 대신에 몰래 딸의 대학 원서 접수를 도와주고, 딸의 방을 들어갈 때에는 항상 노크를 해주는 아버지가 레이디버드 곁에 있다. 그녀가 존재하는 데에는, 두 사람 모두의 염원이 담겨있다. 본인은 정작 현실의 문제로 우울증을 앓아도 딸의 낭만을 지켜주고픈 아버지와, 본인의 낭만은 진작 지워졌음에도 살아남기 위하여 현실에 충실한 어머니가 있기에, 레이디버드는, 아니 우리들 모두는 이렇게 행복한 낭만을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
초반부 시퀀스에서 레이디버드가 차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나, 첫 남자친구 대니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 혹은 엄마한테 몰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쓴 사실을 들키는 장면은, 다른 부연 설명 없이 후다닥 넘어간다. 영화는 그 사건들 자체에 구심점을 두고 있지 않다. 각각의 사건은 레이디버드의 삶에 조금씩 일조할 뿐이지 결코 중요한 일들이 아니다. <레이디버드>에서는 레이디버드가 가장 중요할 뿐이다. 뉴욕으로 넘어간 그녀는 자신이 레이디버드가 아니라 크리스틴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크리스틴이 된 후에 레이디버드의 기억들은 단지 주마등처럼 밖에 남지 않는다. 기억 저편에 떠오르는 그 짤막한 쇼트들, 구심점 없는 쇼트들이 그녀 삶에 파편으로 부유할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남아있기에 레이디버드는 존재한다. 레이디버드는 기억이다.
우리네 삶은 레이디버드에서 크리스틴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우리 크리스틴들은 레이디버드를 잊으면 안 된다.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마음에 남아있는 에너지 중 몇 안되는 것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