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 dir. Eric Rohmer
에릭 로메르는 테렌스 맬릭이나 루카 구아다니노처럼 허투루 자연물을 스크린에 담지 않는다. 울창한 숲도 밀려오는 파도도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에릭 로메르는 단 하나의 사람만을 다루지 않는다. 어떤 인물도 그의 영화 속에서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그런 에릭 로메르가 그의 영화에서 사람, 그리고 관계를 대하는 태도는, 모든 인간을 관계로써 말하면서 인간 개개인이 마음 깊숙이 갖고 있는 감정을 소중이 다루려 노력한다.
녹색은 프리즘의 일곱 가지 색 중에, 파랑과 빨강의 사이에 있는 색이다. 그러면서도 하늘에의 푸름과 노을에의 붉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여 보편과는 거리가 먼 색이다. 에릭 로메르는 쥘 베른의 『녹색 광선』에 덧대어 그런 녹색을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내려갈 때 보이는,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는 특별한 색이라 한다.
극 중 델핀은 휴가를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이왕이면 남자와 함께 보내길 기대하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덕에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어떤 기회가 오더라도 도망가기만 하는 그녀의 우울은 서사가 전개될수록 극심해지고 누구와 있든 울음을 터뜨린다. 관계에의 욕망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은 에릭 로메르가 영화 속에 내보이기 좋아하는 주제다. 여성의 심리와 일상의 단상을 연결지어 그의 방식대로 꼬아 보여주는 능력은 여타 감독들보다 더욱이 탁월하다. 델핀의 내재된 욕구가 반영된 “녹색”에 그녀는 관계에의 희망과 욕망 모두를 투영함으로써 현실 속 기표에 개인 각자의 감정을 기의로써 부여하기를 선호하는 인간 보편 경향을 보여준다.
델핀은 그녀를 관찰하는 우리네 관객의 모습이면서, 또한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조소하는 베아트리스나 프랑수아즈 또한 우리네 관객의 모습이다. 마치 본인은 그렇지 않은 듯 델핀에게 당신 그러면 안 된다고 권고하고, 그녀를 위해서 내뱉는 충고라는 듯 포장하는 모습이 현실 주변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우리 모습이다. 동시에 델핀은 우리의 겉이 아닌 내면 깊게 자리하고 있는 표상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공감하게 하는 양가적인 태도를 보이게 한다. 에릭 로메르가 <여름 이야기, 1996>의 주인공 가스파르의 치부를 보임으로써 관객 모두에게 부끄러움과 안도감을 선사한 것처럼, 그는 인간의 스크린 바깥의 사람들의 꼭꼭 숨겨진 내부를 아프게 꼬집으며 동시에 어루만지기도 한다.
델핀은 서사가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에 우연히 만나던 수많은 남자들 끝에 본인의 이상형과 가까운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와 함께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수평선 끝에 녹색 광선의 그 찰나를 목격하게 된다. 그런 극적인 장면을 끝으로 엔딩 크레딧을 띄우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적 시선은, 봉준호의 불씨 또는 션 베이커의 방법론과 닮았다. 인간 욕망에 근원적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고서 막연한 빛 하나를 툭 던지듯 놓고 빠져버리는 카메라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희망이라는 뻔한 단어로 대체하기에 충분하다. 그가 사계절 연작에서 제시하던 서사의 방향성과도 동일하게,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에 깊게 잠식되지 않는다. 그에게 영화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