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 dir. Guillermo del Toro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초기작 <악마의 등뼈>는 <판의 미로, 2006>의 전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공통점을 다소 지니고 있다. <판의 미로>에서의 주인공 아이 오필리아는 <악마의 등뼈>에서 또한 순진무구한 아이 카를로스와 평행선을 달린다. 그들은 기예르모 델 토로가 축조한 작은 세계에서 한편으론 무진장 답답하게, 한편으론 몹시 대견하게 살아나간다. 그 배경에는 두 영화 모두 스페인 내전이 자리하고 있고, 둘은 일종의 약자로서 건장한 성인 남성인 비달과 하신토에 대립한다.
<악마의 등뼈>에서 아이들 편을 들어주는 인물들 또한 어딘가 하나씩 결여된 인간형에 해당한다.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차고 다니는 카르멘과 하얗게 나이가 들어 성 기능을 포함한 기력을 상실한 카사레스는 델 토로 감독이 젊은 남성을 기득권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사회적 약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의 방증이다. 하신토는 그리하여 본인이 갖고 있는 무력 하나만으로 고아원 전체를 잡아먹기에 다다른다.
파시스트 정권에 대립하는 공화파로서의 카르멘과 카사레스는 영화 내에서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인간형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카사레스는 죽은 태아를 럼주로 담가 발기부전에 좋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마시고, 카르멘은 욕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미 연인이 있는 하신토를 불러 관계를 맺는다. 그들의 이념이 통상적으로 “옳다”고 말해질지라도 그들의 행위 혹은 본능은 옳지 못하며 어쩌면 추악하다고 말해질지도 모른다. 델 토로 감독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묘사를 지양하는데 심지어 아이들마저도 하신토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내전은 전쟁이 아니라 병, 적이 내 안에 있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는 생텍쥐페리의 격언처럼, 그들은 생존을 위하여 살인이라는 정신병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살인하도록 동조해준 카사레스의 영혼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고아원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희망의 시선이 아니라, 너희들을 정신병의 세계로 끌어들여 미안하다는 시선이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
카사레스는 죽은 태아로 담근 럼주를 팔아 고아원의 유지비를 보태고 있다. 그러고는 카를로스가 보았다는 귀신과 ‘악마의 등뼈’라 불리는 그 럼주의 발기부전 치료 효능을 동치에 두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의 발기부전을 위하여 한 잔 크게 들이킨다. ‘악마의 등뼈’도 귀신도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는데, 술이 발기부전에 효능이 있는지는 몰라도, 귀신은 하신토를 죽이기도 하고 방에 갇힌 아이들을 풀어주기도 하는데, 이는 실존하는 ‘두려움’의 존재성을 보여준다. 결국 내전이 야기한 죽음에의 두려움이 그들을 살인이라는 정신병으로 이끌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1964>의 그것과 닮은, 고아원에 남아있는 폭탄은 정신병의 보균체로서, 산티가 귀신이 되기 전 하신토에게 죽은 그날 밤 폭풍우 내리는 하늘로부터 떨어졌다. 영원토록 터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내전으로 생긴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이자 정신병이다. 죽은 산티도 카사레스도 폭탄처럼 영혼이 고아원에 남아 떠돌고 있다.
빛바랜 사진처럼, 호박에 갇힌 곤충처럼, 그들의 감정은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