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소녀>

2017 / dir. 김의석

by Werther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죄 많은 소녀>는, 개인적으로 침체하여가던 한국영화계의 몇 안 되는 빛과 같이 나타났다. 전여빈 배우는 <한공주>의 천우희 혹은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 <누에 치던 방>과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의 이상희 배우의 발자취를 이을 것이요, 김의석 감독은 한국 독립영화계의 영웅이 될 것이다.


<죄 많은 소녀>는 첫 시퀀스부터 인상적이다. 서사 전개상 후반부 사건 중 하나를 끌어와 일종의 전조로써 보여준다. 영희(전여빈)는 반 아이들 앞에서 수화로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 관객은 절대 이를 통하여 영희의 속내와 영희가 겪은 사건의 일면조차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모습을 통해 영희라는 사람을 조금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점은 영희의 복귀를 학생들에게 소개하던 교사라는 작자는 프레임 모퉁이에 배치되어 있는데, 영희가 수화를 거침없이 내뱉을수록 그는 점점 프레임 바깥으로 향한다. 그 모습이 본인의 발로 나가는 것인지 내몰리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이는 결국 앞으로의 영화 속 이야기가, 혹은 영희 내면에 들끓는 서사가 어른을 배제한 미성년들만의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경민의 실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커다란 서사의 줄기 이전에, 영희와 한솔, 그리고 경민의 관계를 암시하는 시퀀스가 삽입되어 있다. 영희와 한솔은 어느 드러그스토어에서 점원에게 귓속말한 뒤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가는데, 점원은 경민을 도둑으로 몰아세운다. 관객은 영희가 점원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지만, 그 장면은 영희에 대하여 “나쁜 사람” 혹은 “따돌림을 조장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심어놓는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우리는 영희를 편견 어린 부정적 시선으로 지켜보게 된다.


지하철 탑승구 언저리에 서 있는 영희와 한솔을 카메라는 그 반대편에서 고요히 지켜보고 있다. 프레임 바깥에서 경민이 들어오고, 셋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데, 카메라는 너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바람에, 또한 이야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지나가는 지하철이 카메라의 시선을 가리기 때문에, 지하철의 우렁찬 소리가 관객의 귀를 방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영화는 ‘알지 못함’이 무엇인지를 시각적으로 그리고 청각적으로 가려버림으로써 우리에게 던진다. 이 영화는 이해와 편견에 대한 영화다.


1차적으로 어른들은, “가시적인 상처”가 아니면, 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생리통 때문에 잠시 쉬러 양호실을 들른 영희는, 양호선생님으로부터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생리를 하냐는 핀잔을 듣는다. 영희는 보란 듯이 휴지로 피를 닦아 프레임에 대놓고 보여준다. 그녀를 의심한 것은 양호선생님뿐만이 아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도 영희가 노골적으로 피 묻은 휴짓조각을 프레임 정중앙에 내보이기 전까지는 경민의 실종 사건에 대한 형사들의 신문을 피해 도망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형사의 신문에서는 몹시 뻔할 정도로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성년이라 무시하고 핍박하며 겁주기까지 한다. 그에 대하여 모르쇠로 일관하던 영희는, 잠깐의 심적 변화를 갖는다. 무지막지한 신문 끝에 영희와 경민의 관계에 있어 아우팅을 범한 형사의 폭언, 그를 노려보는 영희의 매서운 눈빛 위로 그녀의 심적 변화를 암시하는 어떤 음향이 지나간다. 그녀는 경민이 실종되던 날 밤 있었던 일 중 일부를 형사에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진실을 얘기하면(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끝끝내 알 수 없지만) 이해가 따라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상황은 그녀를 더욱 괴롭게만 한다. 그녀가 뱉은 진실은 겨우 휴지에 생리혈을 조금 묻혀 보여주는 것에 해당할 뿐이다.


정작 아주 깊은 상처, 본연의 상처는 홀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 신문 시퀀스 다음에 그녀는 화장실에서 생리혈 낭자한 생리대를 꺼내어 홀로 확인한다. 그녀의 상처는 생각보다 더욱 깊은데, 그녀 혼자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즈음부터 영화는 관객에게 그녀에 대하여 열어놓기 시작하고, 관객은 서서히 그녀에게 감정 이입하기 시작한다. 경민의 장례식에서, 온전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의지를 뒤로하는 형사와 교사의 태도에서, 내뱉음과 이해의 괴리 속에 그녀는, 결국 말 한마디 하기 어려운 농아가 되어버린다.


아주 당연하게도, 어른들은 영화적 의사소통에서 배제된다. 매우 평면적인 캐릭터들, 그들의 속내는 전혀 비치지 않는다. 교장은 “꼰대”의 대명사이고, 거기에 빌빌 기는 여타 어른들도 다른 바 없다. 반면에 아이들, 그들은 서로를 싫어했다가도 좋아하게 되고, 그들의 표정은 그들의 속내를 구구절절 우리에게 털어놓는다. 한솔은 경민을 질투했었고, 반 아이들은 그 오해의 도가니 속에서 허우적댔었고, 그중 몇은 사실 영희를 동정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도 영희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희이다. 교실 앞에서 수화로 내뱉는 영희의 처절한 몸부림, 영화 후반부에서 또 등장하는 시퀀스에서 자막이 영화의 일부로서 흘러가는데, 관객은 이해하지만, 학생들은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한다. 농아와 수화는, ‘결국 이해하지 못함’에 대한 영희의 항거이다. 한솔의 손가락을 자신의 목에 난 커다란 수술 자국에 집어넣는 것은, 주변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로서의 동성애 관계를 상징함과 동시에 발성이 이루어지는, 즉 내뱉음이 이루어지는 목이라는 부위를 교차한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의 영희는, 지금껏 자살할 예정이라는 암시를 수없이 던져온 만큼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그 묘한 표정의 한 번의 돌아봄은 우리와 눈을 맞추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영화는 결국 영희와 경민이 왜 죽으려 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로써 그 이유를 계속 말해왔다. 어쩌면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봐왔던 관객들의 생각의 흐름이 그 정답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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