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다시 겨울, 혼자

by 수취인불멍


O에게


오늘은 괜히 많이 걸었어.

집 앞 큰길에서 버스를 타면 금방 갈 거리인데도,

일부러 두 정거장쯤 더 걸어보기로 했어.

햇빛이 눈에 직접 들어오는 각도도 달라졌고, 공기 냄새도 전보다 조금 더 차가워졌더라.


작년 이맘때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던 것 같아.

네가 추위를 많이 타서, 편의점에서 핫팩을 잔뜩 사 들고 나왔던 기억이 나.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어깨를 움츠리던 너 옆에서,

괜히 더 떠들고 더 웃겨 보려고 했던 나도 생각났어.

그때는 계절이 바뀌는 게 설렘이었지.


근데 오늘은 같은 길을 걸어도 느낌이 달랐어.

간판은 그대로인데 색이 바랬고,

네가 예쁘다고 했던 가게는 리모델링 중이었고,

공원에 심어놓은 나무 잎은 어느새 반쯤 떨어져 있었어.

이 길이 낯선 건 아닌데, 너 없는 계절을 처음 맞는다는 사실이 낯설더라.


똑같은 계절인데, 전에 같이 걷던 사람만 없을 뿐인데 공기가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구나 싶었어.

한 번 바뀐 계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1년이면 되잖아.

다시 비슷한 온도가 오고, 비슷한 냄새가 나고, 비슷한 옷을 꺼내 입게 되지.


근데 사람 사이의 시간은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아.

네가 한국에 있던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똑같은 계절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아니더라.

이미 한 번 지나가 버린 장면은 다시 찍어도 그대로 나오지 않는 것처럼.


너 없는 계절이란 말이 사실은 너만 없는 계절이 아니라,

너와 걷던 나도 없는 계절일거야.


그때 옆에 서 있던 나는 조금 더 서툴렀고, 조금 더 철없었고,

사랑을 믿는 방식도 지금과는 달랐을 거야.


너를 떠올리다 보면, 결국 그때의 나를 같이 떠올리게 돼.


그래서인지, 길을 걸을수록 네가 보고 싶어진다기보다 그때의 우리 둘이 통째로 아득하게 느껴졌어.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주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어.


오늘 걷던 길도 언젠가는 또 기억 속 장면으로 남겠지.

그래서일까. 그저 이렇게 길을 걷다 문득 네 생각이 떠올랐고,

그 생각을 혼자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적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완전히 나쁜 날로 만들지는 못할 것 같아.


오늘의 공기와 보도블록의 온도를 기억해 두려고 애쓰는 저녁이야.

언젠가 이 계절을 다시 떠올릴 때, 무엇보다 먼저 네가 없는 서울보다,

그래도 네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내가 먼저 떠오르면 좋겠다.


길을 걷다 문득, 너 없는 겨울을 생각했던 C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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