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

"마냥 억누르지 말아야할 슬픔"

by 수취인불멍

얼마 전 친구와 집 근처 위스키 바에 갔다.

스크린에 고전 영화가 흘러나오는 분위기 좋은 바였는데,

마침 거기서 <로마의 휴일>이 나오고 있었다.


스크린샷 2025-12-07 오후 10.10.58.png


명작은 결말을 알고도 또 보게 된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됐다.

긴 여운이 남는 ‘그레고리 펙’의 마지막 표정과 긴 테이크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역시 슬픔을 억누를수록 더 매력적이라는 건


ㅣ“예술작품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아주 좋은 선택이다.


우리는 삶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맞닥뜨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됐든, 소중한 사람의 시한부 선고가 됐든, 연인과의 이별이 됐든,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가 됐든, 아니면 이보다 더 사소한 어떤 것들이 됐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는 노력에 익숙해져 있었다.


ㅣ우리에게 ‘울어!’보다 ‘왜 울고 그래’라는 말이 더 친숙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다들 <햄릿>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면 실제 희곡을 읽은 사람은 많지는 않았다.

전공자들이 봐도 재미있는 희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 당시 교수님이셨던 이강백 선생님(사실상 우리나라의 대문호이다)의 수업이 끝나고 찾아가 왜 이 재미없는 햄릿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웃으시며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돼”라고 하셨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햄릿>을 읽지는 않아도 다들 그 유명한 대사는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햄릿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허나 사실 이것은 굉장히 표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햄릿을 ‘애도의 부재’를 겪은 우울증 환자로 봤다.


그렇다면 ‘애도의 부재’는 무엇이었을까?

예전에 참 재미있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다시 그 논문을 찾을 수 없어 너무나도 아쉬운데,

타 지역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햄릿이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담은 편지를 받기까지의 시간과,

그 후 햄릿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거리와,

당시 운송 수단을 통해 걸린 기간을 추론한 계산 값이었다.


ㅣ약 3개월가량이 소모된 것으로 계산됐다.


이는 자신이 소식을 듣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장례가 끝나 있었고,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삼촌이 새로운 왕 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어머니는 삼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ㅣ결국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이미 변해버린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는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졌고, 슬픔을 소화하지 못한 채 깊은 우울감에 빠져갔다.

이렇듯 프로이트는 슬픔에 대해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ㅣ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과 욕망을 억지로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우울증과 정체성의 상실에 가장 악영향을 초래한다는 점을 말했다.

재작년 같이 살던 룸메이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적이 있다.

3일 내내 장례식장에 있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는데, 당시 참 많은 감정이 들었다.

3일장이라는 절차야말로 어떻게든 슬프기 위한 모든 과정을 다 거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관 때도, 발인 때도, 염을 할 때도, 화장을 할 때도,

가족들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때는 참 잔인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ㅣ그 3일간의 과정 동안 최대한 슬퍼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든 더 많이 슬퍼야 한다. 그래야 나아갈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밤, 또는 언제든 이 글을 보는 당신.

슬픔에 빠져 있거나, 꾹 참고 있다면 굳이 참고 버티지 말고 털어내라.

버팀으로써 더 깊은 우울감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신의 계획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울고 털어내는 것이 당신의 내일이 삶의 단 1퍼센트라도 나아지게 할 테니까.



[작법 노트] 억압된 슬픔을 글쓰기로 소화하는 법


슬픔을 억지로 참으면 햄릿처럼 내면의 고통이 우유부단함이나 우울증으로 변질되듯,

글쓰기에서도 억압된 감정은 '지루함'으로 나타난다. 글쓰기를 통해 슬픔을 제대로 ‘애도(哀悼)’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애도할 시간’을 글에 부여하라.

억지로 밝은 결론을 내지 마라. 슬픔을 다룬 글은 독자에게 ‘3일장’처럼 충분히 슬픔을 느낄 시간을 주어야 한다. 당신의 글이 독자의 울음 버튼을 누르게 허용하라.


2. 억압된 감정을 ‘긴장’으로 전환하라.

억압된 슬픔은 독자에게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긴장감이 된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처럼, 표면적으로는 다른 고민(예: 이직, 진로)을 던지더라도 그 아래에 깔린 진짜 슬픔(예: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상실감)을 독자가 추측하게 만들어라.


3. ‘울음’을 문장으로 치환하라.

실제로 울고 싶을 때, 그것을 꾹 참고 대신 문장의 호흡으로 바꾸어 표현하라. 숨이 막히듯 짧은 문장(...했다. ...아팠다.)을 연속해서 쓰거나, 한 문장에 호흡이 긴 감정을 폭발시키듯 길게 늘여보라. 감정의 흐름 자체가 문체의 리듬이 될 것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학교를 떠난 아이들과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