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언어를 인정하기"
얼마 전, 수원까지 수업을 다니던 때가 있었다.
글을 배워 보고 싶다며 연락을 준 마흔 살 즈음의 수강생이었는데,
그 분은 사시는 곳은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 있었다.
오래된 골목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먼저 보이는 한옥집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나는 한동안 현관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무 기둥과 낡은 기와, 낮은 처마와 좁은 마당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이상하게 편안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한옥집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날 처음으로 들었다.
하지만 수업을 오가며 듣게 된 한옥의 현실은 조금 달랐다.
겨울마다 틈새 바람을 막기 위해 공사를 해야 하고,
여름마다 다시 도배와 방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유지 보수 비용과 신경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에서 자라던 한옥살이의 꿈을 조용히 접었다.
그 집은 집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나에게 더 큰 매력을 주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마주치는, 강아지 한 마리였다.
(실제로는 이것보다 훨씬 더 귀여운데, 내가 사진을 못찍는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너무 가까이 달려드는 바람에 콧등만 크게 찍히거나,
눈이 반쯤 감긴 채 흔들리는 사진만 남았다.
사진 속에서는 영 어정쩡해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눈빛이 유난히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개였다.
수업을 가는 날이면,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녀석의 발소리가 들렸다.
발을 구르듯 마당을 뛰어오는 소리, 미끄러지는 소리, 현관문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문이 열리는 즉시, 녀석은 내 손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나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손을 핥았다.
한두 번 쭉 훑는 정도가 아니라, 1~2분이 지나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도 조금 당황했다. 손을 살짝 빼면 더 깊숙이 파고들었고,
다른 손을 내밀면 그 손으로 전장을 옮겼다.
이 집에 처음 온 날에도 그랬고, 여러 번 찾아간 뒤에도 그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손을 미친 듯이 핥는 걸까.
이게 이 아이에게는 어떤 언어일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버스 안에서 강아지의 언어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사람 손을 끊임없이 핥는 행동에는 여러 해석이 있었다.
반가움, 애정, 불안, 그리고 복종. 그중 내 눈에 가장 박혔던 단어는 ‘복종’이었다.
처음 본 나에게 갑자기 복종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내가 이 집의 주인도 아니고, 밥을 주는 사람도 아닌데.
한편으로는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강아지의 세계에서 이것은 아마 “나는 너보다 아래야.
그러니 날 해치지 마”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 아이가 배워 온 세계에서는,
이렇게 복종하는 몸짓이 자신을 살리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입만 열면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훨씬 많다. 개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녀석은,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나에게 복종을 선택했을 것이다.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이 행동의 의미를 모르고 화를 내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손을 더럽힌다고 욕을 하거나, 털이 묻는다고 발로 툭툭 차는 사람들.
그럴 때 녀석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분명 자신은 “나는 너를 좋아해”, “나는 너를 무서워해”,
“그러니까 나를 해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을 텐데,
상대는 그 언어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채 공격부터 했을 것이다.
복종하기 위해 택한 행동인데, 그게 또 다른 폭력의 이유가 되어버리는 장면.
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존재들과 함께 살아간다.
강아지와 사람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같은 인간끼리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 다른 표현 방식 때문에 싸우고,
같은 말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서 오해를 키운다.
“괜찮다”라는 말을 어떤 사람은 진짜 괜찮다는 뜻으로 듣고,
또 어떤 사람은 “다시는 묻지 마”라는 경고로 듣는다.
“나는 농담이었어”라는 말 뒤에 숨은 진짜 뜻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표현을 쓴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야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모든 혼란은
내 언어를 기준으로만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이라도 강아지의 입장에서, 아이의 입장에서, 노인의 입장에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을 다시 들어보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엇갈렸을까.
우리는 상대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분노부터 느끼고,
그 분노를 정당한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단한 소통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 더 천천히, 상대의 언어를 상상하는 일.
“왜 이렇게까지 손을 핥을까?”
“이 말 뒤에 숨은 진짜 두려움은 뭘까?”
“지금 이 사람이, 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뭘까?”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표현을 읽어보려는 시도.
그 한 번의 시도를 생략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언어만 가득한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둬 버린다.
세상은 좁아지고, 관계는 단순해지고, 모든 건 너무 쉽게 단정된다.
한옥집 마당에서 내 손을 핥던 그 강아지는,
아마 오늘도 누군가의 손을 열심히 핥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건 나를 더럽히려는 행동이 아니라,
자기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언어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더 천천히 읽고, 더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각자의 언어로만 가득 찬 작은 세상에 평생 갇혀 버리고 말 것이다.
[작법 노트] 읽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글쓰기
강아지의 '핥음'이 '복종'인지 '애정'인지 헷갈리듯, 독자도 작가의 의도를 자주 오해한다. 불완전한 언어를 보완하여 내 진심을 독자에게 정확히 배달하는 3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1. 독자만의 사전을 먼저 펼쳐보라.
글을 쓸 때, "이 단어를 독자도 나와 같은 의미로 알까?"라고 자문해 보라. 예를 들어 '행복'이라는 단어를 쓸 때, 내가 생각하는 행복(안정)과 독자가 생각하는 행복(쾌락)은 다를 수 있다. 추상적인 단어일수록 구체적인 상황으로 풀어서 보여줘야 오해가 없다.
2. 문맥이라는 꼬리를 흔들어라.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고 핥느냐, 흔들며 핥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앞뒤 문맥이 충분하지 않으면 독자는 당황한다. 내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느낀 감정인지 전후 사정을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다.
3. 소리 내어 읽으며 오역을 잡아라.
눈으로 볼 때는 몰랐던 어색함이, 소리 내어 읽으면 귀신같이 드러난다. 나는 탈고하기 전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내가 쓴 문장이 독자의 귀에 공격적으로 들리지는 않는지, 혹은 너무 주눅 들어 있지는 않는지. 억양과 리듬을 점검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