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VVIP”
(*이번 글은 총 3부로 구성됩니다)
몇 년 전, 나는 어느 기업 명예회장의 자서전 대필 작가 일을 했었다.
회장님을 만나러 갈 때면, 건물 입구에서부터 경비원들에게 신분 확인을 받아야 했고,
이를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펜트하우스가 나왔다.
넓은 거실을 지나 일하시는 분들의 안내를 따라가면, 조용한 서재에 회장님이 앉아 계셨다.
한 때 모 기업의 회장님이셨고,
지금은 회장를 물려주고 내려와 명예회장으로 계셨다.
자서전 작업은 인터뷰 한 번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약 3~4개월 동안 나는 회장님 집을 들락날락하며 여러 이야기를 듣고,
그 세계의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은, 회장님 소유의 골프장에 따라갔던 날이었다.
기사님이 운전하는 검은 벤츠의 뒷자리.
나는 회장님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골프장 입구에 도착하자, 정말 드라마에서나 봤던 장면이 펼쳐졌다.
입구 양옆으로 직원들이 길게 줄을 서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회장님은 고개 숙인 직원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고,
나는 옆자리에서 내렸다가 얼결에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직원들은 나에게도 철저히 VVIP 대우를 해줬다.
그도 그럴 것이, 회장님의 벤츠에서 회장님과 나란히 내린 젊은 남자라면
이곳 사람들 눈엔 꽤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실상은 골프에 ‘골’ 자도 모르는, 그냥 허름한 대필 작가였을 뿐인데.
게다가 그날은 갑작스럽게 호출을 받았다.
청바지에 맨투맨, 컨버스 운동화에 백팩 하나 메고 회장님 집에 갔다가,
그대로 골프장까지 끌려온 것이었다.
“작가님 복장 좀 맞춰드려요.”
기사님의 한마디에, 직원 두세 명이 나에게 붙었다.
그들은 나를 골프장 안 매장으로 안내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골프 라운딩 복장을 준비해 줬다.
나는 보통 옷 사러 가기만 해도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라는 질문이 부담스러워
후다닥 나오는 사람인데,
이곳에서는 옷이 내 몸에 ‘맞춰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거나 빨리 입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내가 조금이라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느낀 건지, 이것저것 더 가져다줬다.
“아… 네, 좋아요. 좋아요. 이걸로 할게요.”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내가 대충 골라 입은 옷값은 모두 합쳐 백만 원이 훌쩍 넘었다.
그날 나는 VVIP 중 한 명으로서,
뭐라도 부탁만 하면 직원들이 뛰어다니는 경험을 했다.
그게 부담스러워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라는 질문이 더 자주 날아왔다.
이 모든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에겐 꽤 큰 피로감이었다.
그냥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회장님 앞에서 소홀해 보일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날 내내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상위 0.1퍼센트의 또 다른 세상.
나는 그날, 잠깐이나마 그 세계에 초대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초대장이 곧 ‘제안’으로 바뀌어, 내 삶의 방향을 잠깐이나마 통째로 흔들어 놓을 거라는 사실을.
2부로 이어집니다.
[작법 노트] 낯선 세계를 관찰하는 글쓰기
이 글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세계, 상위 0.1퍼센트의 공간을 ‘잠깐 빌려 쓰는’ 경험을 담았다. 이런 낯선 세계를 글로 옮길 때, 나는 이런 점들을 신경 쓰려고 한다.
1. 감탄보다 디테일이 먼저다
“으리으리했다”, “대단했다”라는 말만 쓰면 독자는 아무 그림도 못 떠올린다. 대신 골프장 앞에 줄지어 선 직원들, 허리를 숙인 각도, 벤츠에서 함께 내리는 동선처럼 구체적인 장면을 먼저 그린다. 감탄은 최대한 나중에, 장면이 충분히 쌓인 뒤에 한두 줄만 적어도 충분하다.
2. 나의 위치를 분명히 밝혀라
나는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잠깐 초대받은 대필 작가다. 글에서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실상은 골프에 골자도 모르는 허름한 대필 작가였다” 같은 문장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 위치감이 있을 때, 계급 차이와 어색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3. ‘피로감’까지 쓰면 글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낯선 세계를 쓸 때 우리는 종종 화려함만 묘사한다. 하지만 읽는 사람을 움직이는 건 오히려 피로, 어색함,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 같은 감정이다. “나는 사실 집에 가고 싶었다”는 말 한 줄이, 그곳의 화려함과 내 삶 사이의 거리감을 선명하게 만든다. 낯선 풍경을 쓸 때는, 그 풍경이 나에게 일으킨 감정의 결까지 적어두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