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꺼낼때마다 아내는 평생 그 고민만 한다며 가볍게 빈정되곤 한다. 하지만 마치 용수철이 달린 장난감처럼 밀어내도 계속 돌아오는 걸 어쩌나. 언젠가는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해서 다시는 못 바꾸게 꽁꽁 숨겨놔서 이런 고민을 안해도 되는 날을 상상해보곤 한다. 안중근 의사처럼 나는 이 일을 위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날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건 마치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해리 포터가 되어서 마법을 쓰는 상상과 같은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만큼 머리가 컸다.
10대 시절에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전화 상이었는지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했던 이야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엄마에게 당신의 삶에서 나의 존재의 역할에 대해서 물었다. 아니 사실 끊임없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지던 그때의 나는 어느날 내가 엄마의 삶을 고정해주는 압정* 같은 역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걸 확인했던 대화였다. 그 대화가 기억에 남는 건 그 때 엄마와 나 사이에 어떤 동질감을 느껴서였다. 아, 엄마도 나 같은 고민을 했구나. 그런데 그 고민의 해답은 내 선택이나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나 소설들은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인물들의 머리 속에서 수많은 사고들이 흘러가지만 그 삶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건들이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주인공을 전혀 의도치 않은 사건 속으로 말려들게 하거나, 출생의 비밀이 주인공을 마법학교로 이끈다 (출생의 비밀은 정말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클리셰인데 사람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운명이라는 신비의 개념을 가장 값싸게 재현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삶의 의미라는 건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건조하게 얘기하자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랄까. 사실상 외부의 사건들로 인해 결정되어 온 삶의 궤적을 구슬처럼 꿸수 있는 실을 찾는 것? 하지만 결국 꿰어지는 구슬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기억이기에 같은 삶의 궤적에서도 제각각의 설명이 나온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한때 이런 설명들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아내 같은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그 설명들이 그 이후의 삶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의 의미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단정하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답을 내어보려는 조바심에 삶은 우연의 연속일 뿐이다! 라고 이야기할 만큼 어리지는 않다. 또한 삶을 우연의 연속으로 받아들이고 살수 있는 정신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다만 미래를 알수 없는 존재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문제를 신비의 영역에 던지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선대의 생각들 - 종교나 철학 - 에 귀를 기울이는게 그동안 배운 삶을 지속하는 노하우랄까.
결론적으로 고민의 결과는 뭐냐고 묻는다면, 현재의 상황과 나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다음 발자국을 내딛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멀리서라도 바라볼수 있는 이정표가 있으면 좋겠지만 등산에서도 많은 구간에는 그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내 인지 밖의 신비를 존중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나의 발길을 인도한다는 것을 "믿고"** 마음놓고 다음 발자국을 내딛는 게, 삶의 방향을 찾아가기위한 최선이 아닐까. 어차피 방향은 궤적을 다 그리기전에는 알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갑자기 압정이 push pin을 직역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전 아이들에게 말벌과 horse bee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단어들을 마주칠때면 그 단어를 처음으로 번역한 사람들의 깔끔하고 단순한 자세(horse는 말이고 bee는 벌이니 말벌이구만!)가 상상되어 재밌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위험도가 많은 선택지들에 대한 필요치 않은 불안이나 걱정을 잠재워준다. 낭게 신앙은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에 가깝다. 현재 나에게 현재 주어진 것이 나의 다음 발자국에 충분한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만약 잘못된 선택지로 간다고 해도 외부의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 나의 방향을 다시 바로잡을 것이라는 "믿음"이 선택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잠재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