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화위지(橘化爲枳)
춘추전국시대 약소국인 제나라 재상이 강대국 초나라 왕에게 인사하러 왔을 때 초나라 왕이 조롱하기 위해 초나라에서 도둑질하다 잡힌 제나라 사람을 보여주며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왜 이리 도둑놈이 많은 것이요?”
이에 안영 재상은 귤화위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강남의 귤나무도 강북에 심으면 탱자나무가 되는 법입니다.”
평화로운 제나라에서는 평범하던 사람이 살기 척박한 초나라에 가면 도둑으로 변한다는 것으로 초왕의 조롱에 굴하지 않고 비판까지 되돌려 준 것이다. 귤이 종자가 다른 탱자가 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틀린 말이지만, 주변 환경에 따라 사람이 다르게 변한다는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요즘 세태를 보면 오히려 더 맞는 말 같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정보통신(IT) 계열이 급성장하였고 IMF 경제위기 이후 다른 분야보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공급되면서 여성들의 공대 진학이 증가하였다. 특히 컴퓨터, 정보통신 분야 취업 분야에서 여성의 섬세함과 창의성을 요구하면서 증가세는 가속화되었다.
한아름도 98학번 공대생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꿈꿨지만,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대출서비스가 있었다. 가끔 수업을 째고 미팅을 간다거나 여자친구랑 놀러 가는 낭만이 있었다. 지금은 범죄에 가깝지만, 그때는 교수님도 어느 정도 묵인해 주는 여유가 있을 때였다. 대출서비스는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혼자 수업에 들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출석 체크를 하는 것이다. 목소리 톤을 달리해서 대답하는 것이다.
“김민철”
“예”
“이재철”
“넵”
“최정호”
“예이”
“한아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교수님과 수십 명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한다.
수업시간 중 칠판을 향하는 것보다 더 집중된다.
“예”
그녀는 대출서비스를 한 번도 못 받고 모든 수업을 다 들어야 했다.
풍요 속의 빈곤. 수년 동안 여학생이 없는 학과에 들어오게 되면 그 여학생은 전체 학년의 관심을 받게 된다. 심지어는 교수님까지 그녀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다. 부잡한 수컷들이 지각을 하든, 결석을 하든, 대출을 하든 관심 없던 교수님도 여학생이 안 보이면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수업이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별생각을 다 하시는 걸 눈치 없는 수컷들도 알 수 있었다.
주변 모두가 그런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녀가 어떤 특정한 남학생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단둘은 허락되지 않았다.
한아름이 학과 전산실에서 프로그램 과제를 하는데 알 수 없는 에러가 나서 어려움을 겪었다.
근처에 있던 동기에게 도움을 구해 본다.
“야 정호야, 너 이번 프로젝트 준비 잘하고 있어? 이게 자꾸 에러가 나”
“어 그래 함 봐보자.”
프로그램을 실행하니 에러가 나온다. 원인을 찾은 정호가 이야기하기도 전에 뒤에서 손가락 하나가 불쑥 들어오더니 모니터를 가리킨다.
“논리는 맞는데 여기 세미콜론이 안 찍혀서 그러네.”
“그리고 여기 괄호도 맞춰야 하는데 이 파트 따로 빼서 돌리는 게 나을 듯 해.”
분명 정호에게 말을 건넸지만 이미 여러 명이 달려들어 아름이의 숙제를 도와주는 정도를 넘어, 거의 과제를 해주고 있었다. 결국, 아름이는 1 : 1 의 대화는 없었고 일대 다수의 대화뿐이었다. 오히려 풍요 속 빈속이었고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외로움을 느꼈다.
5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스트레스를 날릴 강촌으로 가는 MT가 계획에 잡혔다. 의욕이 앞섰던 과대표는 계절의 여왕 5월의 강촌의 아름다움, 대학생의 청춘을 호소하며 인원을 모집하였다.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으나 회비가 5만 원이라는 말로 열띤 관심은 바로 오뉴월의 서리가 되어버렸다. 아무도 간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 게시판에 지원자 명단은 과대 이름 아래로 한동안 비어있었다.
MT가 예정된 그 주 과대의 발에 불이 떨어졌다.
‘이거 취소해야 하나.’
하지만 그 주 월요일 첫 전공 수업 전 게시판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한다.
“야! 내 이름도 써줘.”
“이름 쓸 자리 없으면 옆에라도 써놔.”
과대 아래 ‘한아름’이라고 적어져 있었고 그 아래 빼곡히 이름이 차 있었다. 심지어 공란이 아닌 다른 곳까지 번호를 먹여 자기 이름을 쓴 친구도 있었다. 거의 공란이었던 지원자 명단은 전공수업 전 아니 아름이가 이름을 쓴 지 15분 만에 다 찼다.
드디어 5월의 청량한 주말,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촌으로 향했다. 강촌은 생각보다 깡촌이었다. 그때는 픽업서비스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직 두 발이다. 5월 새록새록 올라온 풀 사잇길을 따라 개천을 건너 한참을 걸어 들어가서야 MT 촌에 도착했다. 마실 것, 먹을 것, 놀 것, 행사에 쓸 것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이동하는 것은 공대생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치 1열로 공병대가 물자를 들고 이동하는 것 같았다. 아름이는 지휘관처럼 가벼운 배낭만 메고 신발이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히 장소로 이동하였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일사천리였다. 과대는 체크인하면서 마지막 흥정을 하였고 일부는 삼겹살을 굽기 위한 숯불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무리는 족구를 할 수 있는 네트를 설치하였다. 일부는 오늘 장기자랑을 할 때 사용할 CD플레이어 오디오, 마이크, 사이키 조명을 체크하였다. 나머지 체격 미달 공대생들은 햇반이 없던 시절이라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고기와 같이 먹을 깻잎, 마늘, 고추를 준비하였다. 24시간이 채 되지도 않는 시간을 보낼지 알면서도 동기들끼리 모여 준비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 평생 살 것처럼 준비하였다.
밤은 어두워지고 MT 촌 여기저기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여러 대학에서 MT를 온 것 같다. 이에 질세라 공대생이라는 것을 티 내기 위해 사이키를 켜고 마이크를 CD플레이어 오디오에 연결하여 광란의 시간을 보낸다.
‘오~ 허니, 움 쪽. 우 아 우 아’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춤추며 몇 시간이 지났을 때 구석에서 이미 술에 취해 누워있던 한아름이 뭐라고 이야기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야! 다들 조용히 해!”
비상사태다.
박진영의 노래는 정지되고 불이 켜졌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이키 조명만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아름아 다시 말해봐.”
“나쁜 놈의 새끼들,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니들이 알아!! 다 필요 없어. 으으.. 나 화장실 갈 거야.”
같이 학교 다니는 동기는 있었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말을 건넬 사람은 있었지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고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화장실을 같이 갈 친구도 없다. 축축한 학교 화장실에서 자신의 모든 움직임에 대한 소리가 벽에 울려 되돌아오는 느낌은 자신이 이방인임을 매번 느끼게 해 줬다. 갓 스무 살이 넘은 그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쌓여 오늘 술과 함께 무너져 버린 것이다.
1998년 당시 MT 촌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지금처럼 건물이 아닌 컨테이너나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가설건축물로 되어있기 때문에 거의 고속도로 졸음 쉼터에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몸을 가누지도 못해 혼자서 성공할 수 있을까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상태에서 그녀의 신호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두 명이 부축하고 대여섯 명은 뒤를 따랐다. 화장실까지는 왔는데 여자 화장실까지 같이 들어갈 수 없었다. 남자 여러 명이 술 취한 여성을 잡고 여자 화장실 앞에서 있으니 화장실에서 나오는 옆 동 여대생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도망가듯 지나쳤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정호는 심봉사가 심청이를 살리기 위해 동냥젖을 구했던 심정으로 갑자기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대생에게 다가간다.
“저희 여자 동기가 술이 많이 취했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급함을 눈치챈 두 여대생은 최악의 상황에서 아름이를 구원해 주었다. 그리고 지켜주었다.
“동기분이 이미 많이 취해서 우리가 내일 아침까지 봐 드릴게요.”
화장실 앞에 있던 우락부락 뭉툭한 것들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감사하다며 편안한 맘으로 돌아온다. 그게 한아름이 대학생활을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연 것이 되었다. 풍요 속에서 제대로 된 놈이 하나 없어 외로운 대학 생활을 마친 한아름은 IT 대기업에 취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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