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눈질

by seoro


“작은누나가 옛날에 나 괴롭히는 애들도 패줬잖아.”

동생은 얼마 전까지도 종종 그 소릴 했다.

“언제 적 얘길 하고 있어.”

나는 동생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가 뭔가를 더 얘기하려고 들썩이자 그만해.라고 툭 잘랐다. 그래, 나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한 번 그런 적이 있다.


나이 마흔을, 나는 훌쩍 넘어섰고 동생은 코앞에 두고 있다. 나는 결혼하고도 한동안 그 애를 데리고 살았으니 우린 그래도 가족 중에서 함께 지낸 세월이 제법 되는 사이다. 지금은 한동네에 살지만 일 년 가야 겨우 네댓 번 본다. 통화하는 일도 거의 없고 만나도 별 얘기 나누지 않는다. 가족 모임에 동생이 나타나면 나는 조용히 곤두선다. 되도록 그와 멀리 앉아 밥을 먹는다. 안 그래도 까탈스러운 성격인 데다 갈수록 어떤 종류의 불결과 소음을 참기 어려워지고 있는 나에게 그 애는 가장 많이 거슬리는 사람이다. 어떻게 같이 살기까지 했을까. 나는 밥 먹는 내내 그 애가 내는 쩝쩝 소리와 킁킁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어진다.

동생은 내가 네 살 되던 해 겨울에 태어났다. 엄마 뱃속에서 7개월도 채우지 못한 이른 탄생이었다. 그는 몇 달간 인큐베이터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집에 왔지만, 몹시 작고 허약해 내내 부모의 속을 태우다가 급기야 돌 무렵에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충격적인 소식에 엄마는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의사의 오진이었는지 기도 덕이었는지, 동생에게는 그 후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돌 지나 목을 가누고, 세 살 넘어 걷는 더딘 속도였지만 어쨌거나 성장을 차근차근 이뤄나갔다. 엄마는 그때 처방과 치료보다 예수님에게 매달린 걸 인생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교회도 다니지 않으면서 종종 그 애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하느님이 살린 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동생은 부모의 극진한 애정과 돌봄 속에 자랐다. 나와 언니는 그냥 놔두어도 알아서 잘 컸다.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학교 다니고 친구 사귀며 남들 속에서 남들처럼 자라는 딸들의 모습이 엄마에게는 만족스러운 풍경인 동시에 좀처럼 그러지 못하는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대조였다. 나는 어린 동생의 잦은 병치레로 자주 친척 집에 보내졌고, 집에 있을 때도 언니만 졸졸 따르느라 동생과 그리 친하지 못했다. 엄마 옆구리에 매달린 왜소한 아이와 아기처럼 그를 어루만지던 엄마의 모습은, 그 시절 내가 멀찌감치 떨어져 가장 많이 바라본 장면이었다.

꾸준히, 그리 친하지도 않은 동생에게 뭐든 양보하고 배려하고 신경 쓰라는 요구를 받는 일은 나로 하여금 몹시 부담스러웠다. 은근히 그 애를 미워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좋은 건 모두 그 애 차지인 불공평에도 집안의 당연한 분위기에 눌려 불평 한마디 해 보지 못했다. 물론 그 애의 허약한 모습이 때로 안쓰럽긴 했어도 그때뿐이었다. 나는 나대로 자아와 환경과 고루 불화하는 예민한 청소년으로 자라느라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중학생이던 내게 동생과 함께 등교하라고 말했다. 늘 피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탐탁지 않았지만, 그날은 별로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학교 가는 길 내내 동생은 잰걸음으로 나를 쫓았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멀찍이서 걷다가 건널목을 건너자 각자의 길로 갈라섰다. 오른쪽은 국민학교, 왼쪽이 중학교였다.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멀어지던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웬 남자애 하나가 빠르게 달려가 막 교문에 들어서는 동생의 뒤통수를 퍽 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애의 가녀린 목을 거칠게 팔로 휘감았다. 목이 잡힌 동생은 무력하게 휘청였고, 신발주머니가 허공에서 애원하듯 허우적댔다. 그 순간 내 눈동자에서 수십 개의 불티가 뜨겁게 튀어 올랐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 그 자식의 뒷머리를 그악스럽게 움켜잡고 동생에게서 떼어냈다.

“야 이 개새끼야!”

당황한 놈은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과 중학교 교복을 보고는 금방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아, 장난이에요, 장난”

서둘러 내빼는 몸을 잡아채려다 놓쳤다.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등에다 이가는 소리를 내며 악을 썼다. “너 한 번만 더 걸리면 뒤져!” 아직도 부들대는 주먹 안에 몇 올의 머리카락이 쥐어져 있었다.

한동안 동생은 저녁 밥상에서 그 얘기를 들먹였다. 이제 아무도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다며 했다. 누나가 알아주는 날라리고, 정학도 맞아보고, 오토바이 타는 형들이랑도 친구라는 소문이 학교에 쫙 퍼졌다며 활짝 웃었다. 나는 고개를 못 들었다. 그게 반 정도는 사실이라 안 그래도 골치인데 아들에게는 방패막이된다니, 엄마는 난감한 얼굴로 끙, 하고 신음할 뿐이었다. 신나게 떠드는 동생을 아무리 흘겨보아도 그 애는 내가 정말이지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모양인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때 나는 조금 깨달았다. 너는 그렇게 사는구나. 나는 한 번도 그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염려하고 궁금해하는 건 내 몫이 아니었다. 나 말고도 많은 이가 언제나 그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두터운 부모의 관심 안에 있다고 해도 바깥 생활은 혼자 몫이었다. 그 애는 나와 다와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침울해졌다. 마음이 아픈 건지 짜증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내가 해줘야 할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과 그게 뭐든 하기 싫다는 반감이 동시에 일었다.

그 일이 바로 그 일이다. 수십 년 동안 동생이 심심하면 꺼내는 이야기. 그 이후로 동생은 가족 중에 내 말을 가장 잘 따랐다. 사춘기 들어서도 내게만은 순순했고, 크고 작은 일을 꼭 나와 상의하고 싶어 했다. ‘작은누나한테 물어보고.’ 그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그때 나는 어린 그 애에게 일순 영웅으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낡은 이야기 하나가 계속 불린다는 것은, 그 후로 우리에게 더는 좋은 기억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그의 삶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서 갑자기 연민과 애정이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공부, 대학, 친구, 돈, 일, 여행, 연애, 직장, 남들도 하고 나도 하는 그런 경험들 사이로 세월을 바삐 흘려보내면서 어쩌다 한 번씩 그것 중 뭐 하나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동생을 떠올려 보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 애에게는 쉽지 않겠지. 얼핏 보면 잘 모르지만 한두 번 더 보면 들켜버리고 마는 엉성함, 소란함, 특이함. 사람들은 그 애를 피했고 아르바이트는 곧잘 잘렸고 공부는 바닥이었다. 동생에게는 작은 예절, 작은 습관, 작은 법칙들이 학습되지 않았다. 제때 자고 일어나는 일, 수염을 정리하고 손톱을 깎는 일, 밥을 흘리지 않고 먹는 일, 버스 안에서 소리를 낮추고 기계가 말을 안 들어도 내던지지 않는 일, 그런 것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 제발. 내가 결국 못 참고 참견하기 시작하면 그는 말했다. ‘누나가 해줘.’ 내게 청하고 묻고 내게 기댔다. 내가 두려워한 건 어쩌면 그것이었다. 나는 동생이 내 옆구리에 매달릴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자주 화가 났다. 해줘야 할 것이 많은데 해주기 싫은 마음 때문에 내가 미웠고 그런 나 때문에 그 애가 미웠다. 그 애를 미워해서 미안했고, 미안해서 화가 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결국, 어정쩡한 채로 괴로워하던 일에서도 벗어나 동생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마저도 꺼리면서 되도록 멀리, 곁눈질조차 닿지 않을 정도로 그 애에게서 멀리 떨어져 지낸 지 한참이던 날 중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부엌에 서서 들기름에 호박을 볶으며 소소한 추억거리 하나 던져놓듯 태연하게 말했다.

“옛날에 왜 신림동 살 때, 우리 집에 마당 있었잖아. 옥상도 있고. 네 동생 가졌을 때 그 옥상에서 엄마가 빨래를 널고 있었거든. 근데 너도 아직 요만할 땐데, 네가 마당에서 놀다가 빼액 하고 우는 거야. 아휴,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얼른 내다본다고 난간에서 몸을 숙이는데, 거기 옥상 담이 낮았거든. 이쯤밖에 안 올라왔어. 거기에 배가 딱 걸려 기우뚱한 거야, 글쎄. 얼른 몸을 젖힌다는 게 시멘트 바닥에 훌렁 나자빠졌네? 엉덩방아 찧고 신발은 저기까지 날아가고.... 그거 네 아빠한테 말도 못 했어, 혼날까 봐. 그러고는 뭐 그냥저냥 지냈지? 근데 그날 밤에 이상하게 자꾸 배가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그러더라고. 그러고는 그 담날 네 동생이 나와버렸잖아.”

그날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건 파란 양철 대문과 깨진 엄지손톱이 전부였다. 나는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엄지손톱이 부러졌고 몹시 울었다. 엄마가 옥상에서 넘어진 줄은 몰랐다. 그 다음날 동생이 태어난 것도 몰랐다.

나는 얘기를 듣고 놀랐지만 그래?라고만 대답했다. 엄마는 그 애의 준비되지 못한 탄생이 내 탓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나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코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나도 전혀 내 탓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동생은 오늘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그 어떤 날에도 그럴 것이다. 나는 동생의 더럽고 긴 발톱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관에 들어설 때 이미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 말고는 누구도 그 애의 발톱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모른 척하면 할수록 내 신경은 온통 식탁 아래 그 발톱에 가 있었다. 엄마는 식탁 위의 모든 반찬을 동생 앞으로 조금씩 옮기면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가슴에 안고 하나씩 떠먹여 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애틋한 얼굴로 그 애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빠는 오래전 전쟁 시절에 주워 먹었던 나무뿌리 얘기를 한다. 언니는 한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넘기며 보고 있다. 내가 면박을 준 탓에 동생은 잠시 조용해졌다. 요즘 잘 지내? 그 말을 건네면 시작될 그 애의 두서없는 수다를 감당할 수 있을까 가늠해 본다. 동생은 곁에 앉아 이것저것 참견하는 엄마가 귀찮은 듯 응응, 성의 없는 대답을 하고 있다.

너 요즘 어때? 내가 묻자 동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뭐, 별일 없어. 제법 어른 같은 차분한 답변에 나는 놀란다. 별일 있는데? 네 발톱, 늑대 인간 같애. 그 애가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숙여 제 발을 내려다보고는 소리 내 웃는다. 발가락을 수줍게 오므리는 것을 나는 본다. 제발 좀 깨끗하게 하고 다녀. 나는 거기에서 멈춘다. 더 다가서지 않겠다는 의지로. 동생은 응, 하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엄마는 당장 손톱깎기를 찾으러 수저를 놓고 일어난다. 나는 동생을 곁눈질한다. 실은 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더 상관하고 가르치고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코 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시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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