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이에게 거는 마음

by seoro

테니스를 배운 지 2년이 넘었다. 별 고민 없이, 그저 멋지고 재미있어 보여 시작한 운동인데 막상 해보고 나니 너무너무 어렵고 힘든 종목이었다. 몇 번이나 그만둘까 했었지만 본전 생각에 참았고 코치님께 미안해 참았다. 그러다 보니 개미 눈곱만큼씩 늘기는 또 늘었고, 그걸 동력 삼아 열심히 연습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타고나기를 운동에 필요한 모든 능력이 몹시 결여된 나는, 테니스 게임을 하면 언제 어디서나 자꾸 진다.

낮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테니스를 치고 밤에는 각종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4대 그랜드 슬램, 톱랭커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올해도 알람을 해두고 생중계 경기를 챙겨보았다.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지게 해내는 선수들의 몸짓에 나는 볼 때마다 반했다. 그 열정, 땀방울, 오기, 눈물, 인내 모든 것이 녹아있는 드라마틱한 경기를 지켜보는 일은 어느새 내게 가장 큰 위안과 기쁨이 되었다.

특별히 응원하는 선수가 없는 나는 경기가 시작되면 일단 열세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랭킹이 상대적으로 낮은 선수, 부상을 이기고 복귀한 선수, 랭킹은 높으면 그날따라 유난히 고전하는 선수, 해설자가 최근 힘든 일을 겪었다고 알려주는 선수... 그렇게 한쪽으로 마음이 한 번 흘러가면, 그날만큼은 그 선수의 열렬한 팬이 되어 그를 응원한다.


얼마 전 그랜드 슬램의 남자 단식경기에서는 나름 톱랭커인데도 랭킹 1위를 만나 정말로 고투하는 선수를 보았다. 그는 처참하게도 무려 열한 게임을 내리 지며 3세트를 따내야 하는 승부에서 이미 두 세트를 꼼짝없이 내주었다. 그날 그의 패배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도 자꾸만 포인트를 뺏기는 그가 너무나 처절하고 딱해서, 나는 부상 같은 걸 핑계로 그가 기권이라도 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을 쫓았다. 그리고 결국 한 단 게임을 간신히 따냈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 미미한 승리를 온몸으로 기뻐했다.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는 그를 보고 나는 낯선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아주 처참하게 지고 있고, 열 한 게임을 내주고 겨우 한 게임을 따낸 것뿐인데 어떻게 기쁠 수 있지? 그러나 그의 환희에는 아쉬움도 자괴도 없었다. 나는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이처럼 활짝 웃던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또 다른 경기, 여자 단식에서는 한 선수가 돌풍을 일으켰다. 랭킹 200위 바깥의 선수인 그가 그랜드 슬램에서 4강까지 오른 것이다. 그는 거기 이르기까지 모든 라운드에서 극적인 경기를 펼쳤다. 그의 패기와 끈기에 많은 이들이 점점 더 뜨겁게 열광했지만, 매 경기 모든 걸 쏟아붓어 승부를 겨루느라 그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4강 경기 내내 곧 쓰러질 것만 같은 그가 안쓰러워 나는 마음을 졸였다. 결국 그는 랭킹 2위 에게 손쉽게 무너졌다. 그 정도면 무척 잘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애초에 우승 후보는 아니었으니까. 4강도 이미 기적과 다름없었다. 그 정도면 잘했어. 아마도 그가 가장 많이 들을 축하와 위로의 말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 가운데 오직 선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패배 후 너무나 낙담했다. 마치 우승을 안타깝게 놓친 톱랭커처럼.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을 보고 있는 걸까.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욕망과 한계를 내가 처음부터 가늠해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미안해졌다.


매번 지고 있는 사람을, 지고 있는 마음을 성원했던 건 어쩌면 그저 측은해서였다. 겨우 2년 배운 흉내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코트에 들어서고, 서브를 올리고, 리턴을 하고, 놓치고, 벗어나고, 뛰고, 실수하는 그 모든 순간에 대해 나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데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상심과 실망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쩔 땐 속으로 울면서 뛰고, 그러고도 거듭 지면 비참하고 속상해서 바깥으로도 울게 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내가 그들에게 보낸 마음이 동정이었을지는 몰라도, 지는 이들이 내게 되돌려준 건 동정받을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포인트를 잃고 게임을 내줄 때 그들 얼굴에 바람처럼 지나는 절망과 당혹이 내 마음에도 닿아, 나는 파이팅을 외치고 기도하듯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러면 그들은 무언가를 해낸다. 해내는 것이 승리일 수도 있지만 승리와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번에 보았던, 자신의 최선에 조금도 부끄러움도 없는 이의 작은 승리, 또한 자신의 한계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의 용감한 분노. 그들이 해내는 게 무엇이든 간에 내가 마음을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기는 것만큼 대단한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언제나 지는 이의 얼굴에서 남다른 종류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본다. 실은 내게서 찾고 싶었던 것을 본다. 그러니 매번 지는 쪽을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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