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

by seoro


나는 여름 볕에 달아오른 분수대 연석 위에 앉아있었다. 개교 50주년 기념으로 정문 앞에 세워진 작은 원형 분수대였다. 하얀 대리석이 접시 모서리처럼 둘러 있고 중앙에는 그리스 여신인지 소년인지 모를 자그마한 동상이 우아하게 몸을 비틀고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모아 뻗은 동상의 두 손 안쪽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가녀린 물방울들 정도는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리고 말 것 같은 맹렬한 여름 한낮이었다. 한참을 거기 앉아있던 나는 대리석에 닿는 허벅지가 데일 것처럼 뜨거워지자 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교문 쪽으로 걸었다.

정문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방학식을 하루 앞두고 단축수업을 하는 날이니 시내에 나가 놀기로 진작부터 약속했었다. 먼저 끝난 사람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건 우리의 규칙이었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밀려 나오는 아이들을 눈으로 헤쳤다. 그러나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김자연. 촌스러운 것도 같고 예쁜 것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래도 자연아, 하고 발음할 때는 어김없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누구도 쉬이 소리 내 부르지 않았으므로 나도 실은 속으로 더 많이 굴려본 이름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서울에서 지방의 소도시로 전학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내가 나타나면 주변은 어수선해졌다. 여럿이, 혹은 대부분이 힐끔거리고 수군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구경은 하면서도 누구 하나 내게 선뜻 말을 붙이지는 않아서 나는 거의 혼자 지내야 했다. 전학을 오기 전에는 어른들이 골칫거리라고 할 만큼 친구가 많았다. 정신없이 즐거운 시절이었지만, 가지 많은 나무처럼 또 이런저런 바람에 휘말리기도 했다. 부모는 갑작스레 지방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아빠의 명예퇴직과 집안 사정들이 맞물려 있긴 했지만 나를 요란한 친구들로부터 떼어내 공부시키려는 심산도 들어 있었을 것이었다. 어른들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양 볼이 늘 불룩하던 때였지만 어쨌거나 아직 미성년자인 나는 어른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봄이었고, 새 도시와 새 학교에서 새날들이 시작되었다. 대학생인 언니는 서울에 남았고 숙박업을 시작한 엄마는 거의 집을 비워서 집에는 아빠와 남동생뿐이었다. 나는 학교 일과를 대충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서울 친구들과 늦도록 전화 통화를 했다. 두고 온 이들과 멀어진 풍경이 그리워 자주 울었다. 낯선 도시는 골목골목 고요했다. 밤은 빈 동굴처럼 어둡고 아침은 벌판처럼 쓸쓸했다. 하루하루가 마치 설익은 밥알처럼 까끌거렸다. 씹어도 씹어도 입안에 남아도는 시간을 지루하게 곱씹는 나날이었다.


아무도 자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저 소문이 제멋대로 흘러 눈에 띄는 유령 같은 내게까지 자연의 얘기가 닿았다. 그 애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은 그 애가 늘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판잣집에서도 살고 컨테이너에서도 살고 그랬다는데, 그랬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새로 지어진 번듯한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된 모양인데도 여전히 아이들은 그 애를 멀리했다. 한 고장에서 평생을 살게 되면 아무리 달라져도 달라질 수 없는 것이 있는 듯했다. 자연은 그곳에서 언제까지라도 남루하고 빈곤한 어린애였다.


나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종아리를 처음 보았다. 그 종아리가 무척 예뻤다. 그 애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교복 치마 아래로 쭉 뻗은 희고 가느다란 종아리가 섬세한 펜 끝으로 그려놓은 듯 매끄러워서, 나는 그 애가 버스 계단을 하나씩 올라 사라질 때까지 그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자연과 나는 서로 다른 반이었는데도 자주 마주쳤다. 화장실에서, 복도에서, 분수대에서,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은 처음 단 한 번 뿐일지 몰랐다. 그 후로는 내가 언제나 그 애를 발견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애를 겨우 찾아내면 나는 속으로 놀라고 기뻤다. 슬그머니 몇 걸음 뒤처져 나는 자연을, 자연의 종아리를 바라보며 뒤따라 걷곤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몇 걸음 가는가 싶다가 이내 까치발을 들고 걷기 시작하는 그 버릇. 자연은 하나 둘 셋네 걸음쯤 뒤에 슬며시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는 발끝으로 여린 몸을 지탱하며 걸었다. 꼭 겁이 많은 작은 새 같았다. 그 위태로운 걸음을 바라보며 나는 숨을 죽였다.

내가 종아리를 엿본다는 걸 언제부터 알았을까. 어쩌면 그 애가 알길 바라며 내가 한 뼘씩 거리를 좁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하굣길에서 앞서가던 종아리가 멈춰 섰다. 이제 막 까치발을 할 차례였는데. 대신 그 발이 돌아서 내게 다가왔다. 집이 어디야? 그 애의 목소리는 생각만큼 조그맣고 생각보다 밝았다. 그때 나는 우물쭈물 가영 아파트,라고 대답했던가, 바보처럼 웃었던가, 그러고는 입술을 꼭 물었나. 아니면 여전히 그 애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던가.

서울에서 왔을 뿐 별다른 것도 없다는 걸 안 아이들이 내게 흥미를 잃자 나는 혼자 내버려졌고, 그 애 또한 단 하나의 친구도 없었기에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흘러 다니는 소문을 모른 척하고, 자연은 기웃대는 나를 아는 척해주어서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자연은 내게 눈을 둘 데가 되어 주었다가 곧 마음 둘 데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칠월의 목요일, 방학을 앞두고 단축수업을 하던 날, 빛줄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고개를 들 수 없던 그날, 정문 앞이 한산해져도 자연은 결국 오지 않았다. 나는 목덜미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갔다. 머리 위에서 여전히 해가 뜨거웠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자마자 곧장 자연의 반으로 갔다. 밤새도록 연락이 닿지 않아 날이 밝기만을 기다린 터였다. 복도 창으로 그 애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꼭 그 애처럼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자연의 책상은 아직 비어 있었다. 나는 빈자리를 보고도 돌아서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교실 안의 아이들이 불안한 눈길로 자연의 자리를 힐끔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으로 반만 가린 입들 사이로 불길한 속삭임이 오갔다. 교실 안에는 서늘하고 기분 나쁜 공기가 스멀대고 있었다.


나랑 만나기로 해 놓고 자연은 죽었다. 분수대에 앉아있는 나를 어떻게 지나쳤을까. 정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기는 보았을까. 나는 그 생각만 했다.

어떤 소문은 자연이 남자친구의 이별 통보를 비관해 죽은 것이라고 했다. 다른 소문은 자연의 집이 다시 가난해졌기 때문이라고 했고, 그러자 또 다른 소문이 실은 오랜 따돌림 때문에 진작부터 우울증이었다고 했다. 나는 어떤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겨우 석 달을 함께 보냈고, 자연은 말수가 적었고, 있잖아 이거 비밀인데...로 시작하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 나는 범람하는 소문들에서 진실을 가려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자연이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애였다는 가짜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 애의 친구였다.

방학식 말미에 짧은 추도식이 치러졌다. 아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지만, 누구도 울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도 숙이지 않고 손도 모으지 않았다. 나도 울지 않았다. 나는 아직 슬프지 않았다. 세상이 그런 것처럼 나도 다만 어제와 같았다. 방학식이 끝나자 엄숙함에 짓눌렸던 아이들의 억울한 듯 꿈틀댔다. 자연은 죽었는데 여름의 하루는 여전히 한창이었다.


가을이 되어서도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1학년 9반 2 분단의 세 번째 줄, 그곳에 자연의 자리가 그대로 있을까 봐 혹은 없을까 봐, 갈 수 없었다.


가끔 앞서가는 뒤꿈치에 시선이 잡힌 채 생각 없이 걷는 일이 종종 있다. 내가 그러는 건 이제 자연과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자연으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태 그릴 추억도, 잊지 못할 큰 이유도 없다. 나는 자연의 얼굴마저 잊었다. 그러나 모르는 이의 걸음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문득, 하나 둘 셋네 걸음을 걷고는 까치발을 살짝 들어 마저 걷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런 일이 꼭 벌어질 것만 같다. 불가한 기대에 휩싸이면 목구멍 안쪽이 단단해진다. 슬픔 같은 것이 밀려든다.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그날 너는 나를 정말 못 보았는지. 나를 보고는 까치발로 살금살금 돌아섰는지. 내게 할 말이 있었는지, 너무 많아 미처 시작할 수 없었는지. 내가 너의 친구였는지. 그 마지막 여름에 내가 너의 친구였는지.

기억보다 오래 견디는 것은 질문이다. 답을 얻을 수 없게 된 질문은 더욱 그렇다. 만약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나는 너의 어떤 비밀을 습관을 고백을 농담을 보게 되었을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누었을까 만들었을까 지웠을까 기억했을까. 내가 혹시 너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었을까.

물음에 갇힌 물음이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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