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뭐 해 먹었어?
그냥 카레 해서 먹었어.
얘, 그런 거 하면 아빠 좀 갖다 드리고 그래라. 네 아빠가 카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몰랐네.
심드렁한 내 대답이 못마땅한 엄마가 몇 마디 싫은 소리를 더 얹고는 전화를 끊는다. 무심한 듯 굴어도 그런 대화는 저녁 내내 마음 한구석에 걸린다.
아빠는 지방 소도시에서 엄마의 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건강이 부쩍 쇠약해진 지난가을 이후로 종종 서울로 올라 와 며칠씩 쉬다 가곤 한다. 지금도 아빠는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혼자 사는 남동생 집에 머물고 있다. 동생 밥걱정으로 진작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과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구해두었기 때문에 사실 그 집 남자들의 생활은 나보다 더 윤택해 보이는데도, 엄마는 아빠가 올라오면 꼭 내가 가서 뭘 해주었으면 한다. 돈은 돈대로 쓰고 나까지 나서는 건 쓸데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돌아오는 건 늘 인정머리 없다는 타박뿐이다. 그 말에 나는 반박할 수 없다. 가끔은 주책맞을 정도로 넘쳐나는 내 인정이 도통 아빠에게는 솟지 않는 게 나 역시 의아한 일이다.
아빠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게, 오랫동안 주소만 있는 빈집이었다.
한때 아빠는 엄마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공기업에서 일할 때는 동기 중에 승진도 가장 빠르고 양옥집도 제일 먼저 마련해 엄마의 기를 한껏 살려주는 멋진 남편이었다. 이건 아빠 드실 거야. 너 아빠 오시면 다 이를 거야, 엄마의 그런 말을 들으며 어린 나는 아빠가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사람이라는 걸 배웠다.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었지만 나름대로는 나를 제일 귀여워했다는 얘기와 언니에 이어 또 딸이 태어나자 한동안 갓난 애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는 서로 다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둘 다 실제였겠지만 어쩐지 나는 후자 쪽이 아빠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유년 시절 내내 겨우 주말에나 볼 수 있던 아빠는 볼 때마다 흰 러닝 차림으로 신문을 바닥에 쫙 편 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빠 주위를 맴돌며 나는 자랐다. 내가 열서너 살이 되자 국가적 경제난이 도래했고, 아빠는 퇴직금과 꿈에 어린 사업 구상을 안고 안정적인 직장을 나왔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아빠의 사업난이 초래한 가정 경제의 파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곧 서울 집을 잃고 지방으로 이사했다. 엄마는 빚을 내 숙박업을 시작했다. 모든 일이 잘되지 않는 가장 대신 경제적 책임이 오롯이 엄마에게 전가되면서 아빠는 조금씩 집안에서 권위와 위상을 잃는 듯 보였지만, 사업에 대한 희망과 열의만은 놓지 못했다. 더 이상 돈 한 푼 나올 구멍이 없을 때까지 끝없이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며 아빠가 빚어낸 눈덩이 같은 빚은 모조리 엄마 등에 지워졌다. 엄마는 삼 남매와 먹고살기 위해 오랜 시간 돈과 싸웠다. 돈에 밟히고 돈 때문에 울었다. 엄마가 떠맡은 건 돈 문제뿐이 아니었다. 십 대 아이 셋의 훈육과 교육, 가정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도 모두 홀로 감당해야 했다. 아빠는 내내 자리에 없거나 없는 것과 같았다. 아빠에게는 언제나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었다. 아빠는 조용할 날 없는 집안에서도 홀로 고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리 없는 아빠의 무심한 등을 나도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다. 그것은 빈집이었다.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아주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엄마는 전장을 헤쳐 나가는 사람처럼 치열하게 살아내며 태산 같은 빚을 야금야금 청산했다. 언니와 나는 상경해 대학에 진학했다. 보증금 300짜리 반지하 방이 우리의 자취방이었다. 아빠는 가끔 볼일이 있어 서울에 오면 그 방에서 묵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아빠 밥을 챙기라고 성화를 부렸다. 한 칸 아니 반 칸짜리 부엌에서 어설프게 차려낸 밥상 앞에 아빠와 마주 앉으면 수저를 들기도 막막했다. 그저 불편하고 이상하게 송구한 마음이었다. 누추한 집안과 쌓여가는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하느라 밤늦게 오가는 자매를 아빠는 늘 못 본 척했다. 아빠에게는 여전히,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늘 무심하다가도 한 번씩 가족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며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아빠가 온 가족을 무시해 왔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평생을 날마다 일찍 일어나 산책하고 책 보고 운동하고 소식했다. 엄마가 빚 때문에 밤을 지새워도, 아빠의 하루는 정갈하게 시작되었다. 아빠는 아마 스스로 독립적이고 모범적인 생활자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엄마의 헌신적인 돌봄과 대접을 끝없이 받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고난의 시절을 지나며 더더욱 강인해져 하루 서너 시간만 자고도 종일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따금 인간적인 고단함과 자괴감이 밀려오면 자신의 팔자와 아빠의 존재를 뜨겁게 증오했다. 엄마는 격렬한 마음의 동요 속으로 나를 자주 불러들였다. 내가 엄마의 불행과 고통의 충실한 목격자가 되길 바랐다. 그러다가 화가 가라앉고 진정에 이르면 돌연 아빠를 동정하며 내게도 난데없이 도리와 인정을 다 하는 착한 딸이 되기를 요구했다. 나는 엄마 자신도 갈피 잡지 못하는 엄마의 감정들에 휩쓸려 아빠에 대한 미움과 연민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나는 피로했고, 그 피로 때문에 아빠가 더더욱 미웠다.
언니와 나는 일 년 사이에 차례로 결혼했다. 결혼을 결정할 때 상대가 우리의 아빠와는 전혀 다른 남자인 것 같다는 예감이 언니에게도 내게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했다. 아빠와 다르게 세심하거나, 아빠와 다르게 책임감 있어 보이거나, 아빠와 다르게 튼튼하거나, 아빠와 다르게 모른척하지 않을 것 같은, 매번 모르지만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과 우리는 결혼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선택했으니 엄마와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난가을 아빠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엄마의 마음은 측은함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아빠의 나이가 어느새 일흔이 훌쩍 넘었고, 아빠와 함께한 세월이 오십 년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엄마는 피차 괴로운 기억들은 미련 없이 지워버릴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정머리 없다는 엄마의 원망은 그때부터 심해졌다. 엄마는 내게 오랫동안 막 퍼담기만 한 걸 이제는 막 퍼다 내라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두 블록 너머에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다가 나는 동네 사거리에서, 산책로에서 아빠와 마주친다. 코앞에서야 아빠인걸 알아챈다. 밖에서 보는 아빠는 바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낯설다.
아빠, 하고 내가 부르면 그제야 나를 보고 아빠가 활짝 웃는다. 우리는 어색한 이웃처럼 손을 맞잡고 짧은 인사를 나눈다. 밥은 먹었는지, 어디 가는 길인지, 이내 조심히 들어가라며 서로 손을 흔든다. 나는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서두르며 걷다가 곧 돌아본다. 생각보다 빈약한 아빠의 등이 천천히 멀어진다. 몇 분의 시간을 되감아 다시 마주친다 해도 내게는 더 할 말이 없지만, 나는 잠시 해야 할 말을 못 한 사람처럼 답답하다.
마음이 한 포기씩 자라는 풀이라면, 아빠의 빈집 주변에도 그것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심어 두었다. 해묵은 원망과 오해들이 깊숙이 뿌리내린 거기에도 무언가 부지런히 자란다. 세월을 먹고 복잡하고 무성하게 뻗은 잔가지들. 때로 아빠를 바라보는 일은 얽힌 가지들을 헤아리는 일과 같다.
이제 뒤늦게 황량한 빈집에 기척이 반짝인다. 오래된 풀더미 곁에 새로운 마음 한 포기가 돋는다. 나는 서성인다. 시간이 흐르지만 그러나, 어떤 엄두를 내지 못해 그저 난감하고 슬픈 얼굴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