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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pr 23. 2020

동생은 겨울에 태어났다.

동생은 겨울에 태어났다.  

    

어릴 때 우리 집은 넓은 옥상과 마당이 있는 단층 주택이었는데 엄마는 그 옥상에서 이불도 널고 고추도 말렸다. 거기에 둘러진 기와담은 어른 허리 높이밖에 되지 않아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조그마한 마당과 대문이 보였다.


엄마는 어느 해 볕이 좋은 겨울날에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세 살 배기였던 나는 언니와 마당에서 세 발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막 울어댔다. 엄마는 울음소리에 놀랐고 마당을 내려다보며 나를 안심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혹시 다친건지 어떤지를 몰라 당황한 엄마가 배 부른 몸을 담장 아래로 자꾸 기울이다가 중심을 잃었다. 다행히 엄마는 얼른 몸을 뒤로 당겨 넘어졌지만 너무 놀라서 덜덜 떨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뱃속의 동생을 8개월째에 조산했다.     


동생은 미숙아로 태어나 곧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두 딸 뒤에 기다렸던 장손이 그 진단을 받던 날, 아빠는 충격과 실망으로 하루 만에 눈이 흐려져 그 날부터 평생 안경을 썼다. 그러나 동생은 엄마의 백일기도 덕분인지 병원의 오진이었는지 다행히 뇌성마비 징후는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조금 느리게 성장했다. 나는 동생이 태어난 후 이모와 할머니 댁에 몇 개월 씩 맡겨지고는 했다. 아픈 아기를 포함한 세 아이를 돌보는 것이 엄마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년의 나에게 동생에 대한 기억은 많이 비워졌다. 간간히 떠오르는 장면은 몹시 작고 하얗고 귀엽게 생긴 동생의 얼굴, 말도 걸음도 느린 아이를 애지중지 돌보는 엄마의 안타까운 눈동자.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듯 그 애를 힐끗 보는 나.

아마도 언니와 나는 동생이 어떻든 열심히 자신의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흐르던 기억은 온 가족이 탄 자동차 안을 들춘다. 명절을 지내러 시골로 가는 길이었다. 아빠는 운전하고 일곱 살쯤 먹은 동생은 떼를 쓴다. 고속도로의 다른 차들이 우리 차를 추월할 때마다 그 애는 발작처럼 머리를 움켜쥐고 발을 쾅쾅 구른다. 거기 있는 나머지 모두가 찬 물속에서처럼 숨죽인다.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침을 꼴딱 삼킨다. 엄마가 기어이 터질 듯 한 분노로 그 애의 뺨을 후려친다. 그 애는 악을 쓰며 울어대고 하얀 뺨은 금세 손자국 모양으로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창에 얼굴을 붙이고 달리는 차들을 응시한다. 손대지 않고 귀를 틀어막았다.     


내가 동생을 본격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아마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일 것이다. 나는 나대로 너무나 요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내던 터라 사실 그 애와는 말만 남매이지 어떤 유대감도 없었다. 몸이 작고 마른 아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 엄마가 안쓰러워하는 아들. 분명 독특한 존재였지만 나도 크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 애에게 시선을 오래 내어 줄 수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 시간의 물결이 잔잔해지기도 했으므로, 존재감 없었던 그 애의 얼굴이 이따금씩 보였다.

어느 날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그 애를 바라보았다. 젓가락질이 서툴고 성격이 급해서 밥풀과 국물을 연신 상 위에 흘려대고 있었다. 킁킁 코 먹는 소리를 규칙적으로 냈다. 일상적인 대화 두 세 마디 끝에 갑자기 흥분해 언성을 높였다. 신경질이 나면 자기 머리를 감싸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밥알이 돌멩이처럼 커져 목구멍에 턱 턱 걸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너는 왜 아직도 이모양인거야. 나는 순식간의 온몸을 채우는 육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그저 그 자리를 어서 떠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된 언니와 나는 서울로 가고 동생과 부모님은 지방에서 지냈다. 나의 이십 대 시절은 가난하고 바빴다. 몇 년 뒤에 그 애도 어른이 되고 군대에 가고 지방 어디 대학이라는 곳도 다녔다. 엄마가 간간이 들려주는 소식이었다. 어찌어찌 남들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안심도 되었다.

점쟁이가 동생이 성인이 되면서 점점 나아질 거라 했다고 언젠가 엄마는 내게 소곤소곤 말했다. 그러니까 성장 속도만 느린 거지 일단 성장을 이루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을 거라며 희망적인 얼굴로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별로 부대낄 일 없이 20대까지 지나버리고 난 후 서른이 되면서 그 애는 나와 살게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자 부모님은 동생을 데리고 있는 조건으로 마침 서울에 분양받은 집을 내어 주셨다. 나는 그 조건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못 본척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결혼할 사람이 그 애와 잘 지낼듯 보였다. 가끔은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아이인데 왜 그렇게 뾰족하게 구냐며 나를 나무랄 정도로 그 애를 감쌌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미더웠다.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어 평생 동생을 돌봐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도 함께 살면서 그 애를 ‘자세히’ 보게 되자 조금씩 달라졌다.   

   

그 애는 잠시 봐서는 별 다른 점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보인다.

검은색 양말이면 아무거나 집어 신어서 양쪽 모양이 다른 것은 예사고, 여름옷과 겨울옷을 구분해서 입을 줄도 몰랐고, 모든 냄새와 더러움에 둔감해서 자신과 주변을 청결하게 가꾸지 못했다. 작은 생활습관들은 반복되면서 커져갔다. 나중에는 그애의 모든 행동과 뒤처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결혼을 하고 곧장 이어진 임신과 출산으로 여러모로 예민해진 데다 결벽 증세까지 생겨버린 나는 그 애와 한 집에 사는 것이 점점 괴로워졌다. 여태껏 내가 그 애를 ‘자세히’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편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나는 그 애라는 존재가 참 괴롭고 힘들고 귀찮고 미웠어도 남편이 덩달아 그러는 건 싫었다. 조금씩 교묘하게 변하는 그의 행동이, 은근한 무시가, 안 그런 척 돌려 뱉는 불만의 말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모멸감이 들었다. 그가 실망스러웠다. 남편은 몰랐던 것 같지만, 내가 한다고 그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애는 어쨌든 내 동생이었다.     


나의 결혼 생활이 일찍 끝나버린 것이 그 애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을 완전히 놓기까지 수 십 개의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중에 그애가 아주 큰 하나의 이유가 된 것은 분명했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세모난 눈으로 내 동생을 바라보는 것을 모르거나 모른척할 만큼 둥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애는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나도 옛날 점쟁이의 말에 따라 남들같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집안에 틀어박혀 완전한 외톨이가 되려고 하지는 않고, 구직을 하고 일도 하고 얼마의 돈을 벌어 약간의 저축과 제 생활을 한다. 비록 친구도 동료도 없이 늘 혼자인 모습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준 적 없고 도덕적 문제에 휘말린 적도 없다. 그러나 이미 그 애를 자세히 보기 시작한 나에게 그애의 이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반찬 뚜껑 제 짝을 찾아 덮지 못하고, 점퍼의 지퍼가 뻑뻑하면 신경질을 내다 옷이 찢어져버리기도 하고, 덜 마른 냄새가 나는 옷도 그냥 입고 외출하며, 컴퓨터를 붙들고 앉아 있다가는 난데없이 욕을 하고 키보드를 막 두드리기도 한다. 나는 그 애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거실까지 들려올 때마다 어릴 때처럼 손을 대지 않고 귀를 틀어막는다. 가슴에 시멘트 반죽이 서서히 차오르는 압박을 느낀다. 어서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나를 좌절하게 하는 것은 그 순간보다, 가까운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한 번 보게 되면 더 잘 볼 수 있는 숨은 이상함은 이제 내 차지라는 생각이다.


그 애와 같이 산지 이제 10년이 다 되다 보니 엄마는 아무래도 내가 끝까지 그 애의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 존재가 때로 아주 버겁고 괴롭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엄마의 바람이 나는 몹시 서운할 때가 있다. 엄마는 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동생을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잘 보살펴주라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자꾸만, 자꾸만 반복한다. 나는 그 돌림노래에 결국 부아가 치민다.      


-내 자식이 아니잖아. 엄마 아들인데 왜 나한테 책임지래!

-누나가 인정머리 없이, 다른 집 봐봐라. 동생이 부족하면 온 가족이 동생 위해서 살아!    

  

긴 시간 너무 많이 해온 실랑이 속에서 나는 외롭고 피곤하다.

나는 엄마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아들에게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끼고 있음을 안다. 그는 아들의 이상함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는 듯하다. 그도 이제 그 애를 자세히보는 일에 지친 것이다. 그 마음을 나는 눈치챈다. 그의 삶 또한 내가 감히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단했으므로 나는 그가 안쓰럽고, 대견하고, 너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건네받은 짐이 반가울 수는 없다.

그 애의 존재는 나에게 여러 번, 어째서 나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러다가 어째서 나인가, 를 너무 많이 생각했을 동생의 인생을 떠올린다.

말을 하고 걷는 일도, 학교에 다니는 일도, 구구단을 외우는 일도, 친구를 사귀는 일도, 단체 생활을 견디는 일도, 간단한 업무를 배우는 일도, 모든 것이 그 애에게만은 쉽지 않았을 때 그 애의 머릿속을 헤집었을 어째서 나인가, 를 생각한다.

내가 어째서 나인가, 를 아무리 되뇌어도 동생의 그 수에는 미칠 수 없다. 빠르고 차가운 이 세상이 그 애에게는 얼마나 가혹했을지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조금 달라 많이 상처 받았을 모든 순간들이 그 애의 마음을 태우고 어떤 그을음을 남겼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을음에 뒤덮인 그 애의 마음을 생각하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던 나의 원망은 어떤 미안함을 뒤집어쓰고 식어간다.

    

어느 해 겨울날, 엄마와 동생이 내 울음소리에 놀라 함께 넘어지던 날, 어쩌면 나와 그 애의 인생은 서로에게 묶인 채로 시작되었을지 모르겠다. 그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어째서 나인가, 를 벗어나지 못할 나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가끔은 지금처럼 내가 모를 그애의 마음도 헤아려보고 싶다. 사실은 엄마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마지막까지 그 애의 곁에 남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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