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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Oct 30. 2020

그날은 무늬처럼 남았다

그가 없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모든 것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사라진 집에서 나이기도 하고 남이기도 한 목소리를 들었다. 모든 목소리는 나를 비난했다. 불면증과 악몽이 이어졌다. 밤을 엉망으로 보내면 낮 동안은 내내 휘청 거렸다.   

불면증이 심해지자 지인은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주었다. 의사는 삼 십 분 정도 증상을 묻고 약을 처방했다. 집으로 돌아와 약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더니 조현병 치료제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겁이 나서 끝내 약을 먹지 않았다. 

정말로 아픈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아지는 것은 없었지만 나아지고 있다고 자꾸 생각했다. 십 분이라도 더 자려고 노력했다. 낮에 할 일을 찾았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글을 쓰고 싶었다. 얼마간 혼자서 중얼대듯 끄적였다. 

지켜보던 친구가 부천의 한 작은 책방에서 진행되는 글쓰기 모임을 추천해 주었다. 용기를 내어 신청을 했는데 모임 날짜가 다가오자 정말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을 마주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마주 앉을 수 있을까,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줄곧 가지 않을 생각을 하면서도 첫 번째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썼다. 

결국 가지 않겠다는 나에게 친구가 보다 못해 같이 가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동행으로 용기를 냈다. 첫 모임을 가는 한 시간 동안 마른 입술을 적시며 떨었다. 


나의 첫 글을 사람들이 좋다고 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말해주는 거라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알았더라도 기뻐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났다. 나는 한 순간 특별해졌다. 새롭고 좋은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나의 여기저기에서 돋아나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근래 가장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만났던 모두의 얼굴과 말을 녹화 재생 하는 것처럼 들려주었다. 친구는 웃었다. 그 날의 행복은 나의 깊은 곳에 무늬처럼 남았다.




온종일 얼음을 씹어 먹었습니다. 

어금니가 깨지기도 하고 복통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매일 혼자 같은 자리에 앉아 와드득 와드득 얼음을 씹었습니다.

입안과 목구멍, 가슴과 머릿속까지 꽁꽁 얼어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거울 속에 짙은 보라색 입술을 보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이 들면 누군가 나타났습니다.

검고 큰 사람들이 방안을 서성이거나 할머니가 내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곤 했습니다. 

처음엔 겁이 났고 반복되면서 그 시간들을 습관처럼 참아냈습니다.

매일 오는 밤이 무섭고 슬펐습니다.     

온 밤을 곤두서있다 날이 밝으면 내내 졸립습니다. 

눈동자는 늘 약간의 초점이 빗나가있고 행동은 느려집니다. 

나무 껍질 같은 얼굴을 씻고 낙엽 같은 머리칼을 만지고 나서 온 집안에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싫어 한 자리에 앉아만 있습니다.

때때로 혼잣말을 중얼대고 끝없이 얼음을 씹어 먹으며 낮을 보냅니다.

그 모든 시간에 의미도 무게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언제나 밤보다 낮이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밤 옆에서 잠이 든 아이 얼굴을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봉긋하게 다물어진 입술과 가만히 내려앉은 속눈썹은 아가일 때 그대로 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만큼 키운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밤을 헤매고 수많은 낮에 지쳐있는 사이에도 아이는 많이 자라났습니다.     

지금은 다섯 시간도, 여섯 시간도 잠을 잡니다.

먹고 걷고 말하고 웃으며 이리저리 낮을 채워 보냅니다.

그리고 매일 밤 잠든 아이 얼굴을 만지고 봅니다.

하룻밤마다 얼마나 컸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어느 날 모르는 아가씨가 엄마- 하고 우리 집에 들어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2018년 가을 첫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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