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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Nov 03. 2020

처음 네가 머문 곳

“나는 엄마 배 안에서 따뜻하고 졸렸는데.”     


세 살 무렵 아이가 대뜸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정말 그때를 기억하는 것이냐 고는 묻지 못했다. 그 자연스러운 회상의 얼굴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후로 서러운 일이 생길 때 내 품으로 깊이 파고들어 내 심장소리를 듣는것 같은 아이를 보면 꼭 그때 생각이 났다. 희미해진 시절이 가끔 그리운 걸까. 가장 안온했던 곳으로 잠시 도망가고 싶은 걸까. 그런 짐작을 하며 그 애를 더 꽉 껴안아주었다.     


9년 전 결혼식을 할 때 이미 아이는 내 몸 안에 있었다. 임신 소식은 소나기처럼 당황스러웠다. 고대했던 신혼여행을 위험하다는 이유로 취소할 때야 비로소 임신이 나의 일임을 알았다. 첫 마음은 성가심과 부담이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생명이 생겨나 서서히 성장하고 있다는 나의 몸을 좀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서른 넘은 나이였지만 임신과 출산 과정을 진지하게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겠지,라고 막연한 생각만 해 보았을 뿐이었다. 쉽게 떨치지 못하는 피곤과 안 먹던 걸 찾는 식탐만이 유일한 체감이었다.     

배꼽을 뒤집으며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부풀었다. 아이의 존재가 점차 둥글고 명백하게 보여졌다. 그러나 정작 나는 자주 외면하고는 했다. 임산부로 정체성을 옮겨가는 일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제자리여도 임신 과정은 유유히 진행되었다. 일상도 부지런히 변해갔다. 매일 추의 무게가 더해지듯 몸이 무거워지면서 생활의 반경과 높낮이가 전부 줄었다. 소극적인 활동은 생각과 의지도 자주 흐려지게 했다. 스스로가 보호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 꾸준히 죄책감이 들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행복한 특권 중 하나라고 당연하게 배워왔는데, 나는 염치도 없고 철도 안 든 사람인가 혹은 모성애라는 것이 부족한가 싶었다. 혼란스럽지 않은 예비 엄마로 보이고 싶어서 태교 책을 사들이고 클래식을 듣고 보양식을 챙겨 먹었다. 여전히 반가움과 사랑스러움을 도통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을 몰래 하며 다른 사람들을 부지런히 흉내 냈다.   

  

30주가 다 되어 간단한 충치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갔다. 치과 공포증이 유별나서 둥근 배를 껴안고 치료대에 누운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평소에는 움직임이 별로 없던 아이가 뱃속에서 요동 쳤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덜컥 겁이 났다. 아이가 그 안에서 몸을 뒤틀 때마다 배의 표면이 이리저리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순간, 아이가 나와 똑같은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깨달았다. 그 애는 어느 정도의 나로, 내 안에서 살고 있던 것이다.     


그로부터 내 몸은 공존의 장이 되어갔다. 완전히 알아차린 존재에 대한 책임과 관심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 애가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오로지 나이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가 섞여 있는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싶어 졌다. 걸음을 내딛을 때 음식을 먹을 때 말하고 들을 때,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순간에 아이를 떠올렸다. 말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건넸다. 어떤 대답들도 소리없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둘이서 하나의 몸을 쓰며 열 달을 채워갔다. 출산 일이 가까워지자 온 몸이 심하게 붓고 앉기도 눕기도 어려웠다. 나는 신음과 함께 중얼대었다. 

'이제 그만 나오지 않을래.. 나 이제 진짜 내 몸 혼자 쓰고 싶어.'     


아이는 2013년 3월, 약속한 열 달을 다 채우고도 나흘 늦게 밖으로 나왔다. 의사는 “아기가 엄마 뱃속이 좋은지 나올 생각을 안 하네요.” 라며 웃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속을 유영하는 부드러운 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 있는 동안 나쁘지 않았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귀하고 연약한 손님이 비로소 내 방을 떠나는 것처럼 후련하고 애틋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나와 어느 정도의 자신으로 내 안에 살다가 세상에 나온 아이는, 한동안 내 가슴팍과 등 뒤에 붙어 자랐다. 어느 사이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가 이제 저만치 혼자 뛰어갈 수 있을 만큼 컸다. 서서히 그리고 온전히 그 애 만의 그 애가 되었다.      


나는 바라던대로 다시 혼자만의 몸이 되었지만 전과 달랐다. 고유한 기능을 모두 얼마만큼 잃어버렸다. 생각하고 느끼던 방법, 여러 방면으로 뻗던 에너지, 세상을 감각하고 나를 표현하는 일들.

소유와 상실을 겪은 흔적일까. 어쩌면 임신에 비해 결코 녹록지 않은 육아의 고됨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고 단지 나에게도 그럴 때가 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아이를 낳기 전의 나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보호와 공존의 출산 후에 내게 온 것은 쓸쓸함이었다.      


여덟 살의 아이는 지난봄에 처음으로 강낭콩을 심었다. 흙 속에 콩을 묻고 몇 날을 화분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초조해 보였다. 정말로 싹이 날지, 그게 어떻게 생겼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좀처럼 싹이 돋지 않아 애를 태우던 중, 드디어 작고 푸른 잎이 흙을 밀고 올라왔다. 아이는 흥분해서 거의 울 것처럼 좋아했다. 그때부터 강낭콩은 힘차게 줄기를 뻗고 무성한 잎과 꽃을 피우더니 이내 꼬투리에 콩을 맺었다. 아이는 정성으로 그것을 돌보며 모든 순간에 세심하게 기뻐했다. 쑥쑥 커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자 그저 기다리던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그것은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얼굴 같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을 하루같이, 돌봄의 기능으로서만 나는 유지, 발전되어 왔다. 그러는 중에도 아이는 분명한 위안이었다. 돋아나는 강낭콩처럼 그 애도 나에게 황홀한 결과이자 실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 새롭고 생생한 기쁨을 주었다. 동시에 끝없이 한계를 넘어설 것을 재촉하고, 마르지 않는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내가 되찾지 못한 것들은 지금도 그대로다. 하나로 전부를 덮을 수 없고, 쓸쓸함을 다 쓸어낼 수도 없다. 그래도 매일 어제보다 더 어여쁜 한 아이가 맨 처음 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펴지는 것 같다. 잃었다고 여기는 것에서 건져 올리는 의미만큼 큰 위안은 없다.

나는 너를 있게 한 곳, 그리고 네가 처음 머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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