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 었는지 내 생일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언제였다고 해도 그랬을만한 포근한 날이었다.
남동생이 아픈 몸으로 태어난 뒤 세 아이를 엄마 혼자 돌보기가 힘에 부치자 나는 울산의 둘째 이모집으로 보내졌다. 이모도 이모부도 언니들도 모두 나를 예뻐했다. 이모는 하루에 백 원씩 군것질할 돈을 잊지 않았고 이모부는 매일 나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언니들은 그림과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즐거웠고 편안했지만 엄마를 못 본 채 몇 달이나 지나갔다.
그날은 다음에 다음에 라고만 하던 엄마가 나를 보러 온다고 처음으로 약속한 날이었다.
어린 나는 그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이른 아침부터 어서 저녁과 함께 엄마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동동거렸을 것이다. 이모가 해준 계란 프라이도 사촌언니의 예쁜 연필과 공책도 그날만은 관심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부가 무등을 태우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국 정원으로 놀러 나가자고 해도 시큰둥했을 것이다. 무엇도 두둥실 높이 떠오른 구름 같은 내 마음을 잡지 못했겠지.
하루 종일 가슴은 막 부풀었다가 쪼그라들었다가, 펄펄 끓었다가 사르르 식었다가, 돌멩이처럼 뚝 떨어졌다가 탱탱볼처럼 솟구쳐 오르고 난리법석이었을 테다. 나는 제멋대로인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 것 같았다가 금방 만날 엄마 얼굴을 떠올리고는 볼이 붉어졌을 것이다.
이모네 집 옥상에는 이모부가 만든 평상이 놓여 있었다. 평상 끝에 앉으면 대문과 골목까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나는 해가 가장 가까이 왔다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하자마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평상 위에 앉았다. 품에는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다시 눈을 반짝 뜨는 인형이 안겨 있었다. 며칠 전 엄마가 보내 준 소포를 뜯어서 그 인형의 주근깨가 그려진 통통한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꺄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었다. 선물은 처음이 아니지만 엄마의 소포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도 나처럼 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엄마를 만난 것만큼이나 좋았다.
노을이 잠시 세상을 아주 붉게 물들였던 것 같은데 어느 사이 어둠이 야금야금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가 지금쯤이면 버스에서 내렸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저녁 반찬 냄새가 동네 골목에 가득했다. 엄마가 오니까 이모는 맛있는 걸 더 많이 했을 거야, 확신하며 군침을 삼켰다. 몇 번이나 나를 찾는 이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오는 걸 내가 제일 먼저 볼 거야, 엄마가 오면 제일 빨리 뛰어갈 거야, 나는 벼르고 있었다.
이제 어둠이 너무 짙어서 골목길에 서있는 가로등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가 저쪽에서 걸어온다고 해도 나는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옥상 끝에서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있는 대로 빼고 더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골목은 텅 비었다. 갑자기 어둠이 무서웠다. 이모부는 마침내 옥상으로 올라와 나를 번쩍 안았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가슴에서 내려놓은 적 없는 인형을 멀찍이 눕혔다. 인형의 눈은 감겼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엄마가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미리 보낸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눈물이 밖이 아니라 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얼굴이 흐르는 것 위로 넘실대고 있었다. 엄마가 지금이라도 온다면 너무 좋아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최초의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