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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Oct 30. 2020

오래된 기억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순수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추운 날 낡은 코트를 입고 차 밖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는 매번 잊지 않고 문을 열어주거나 의자를 빼주고, 조심하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었다. 생선 가시를 발라 늘 가장 큰 조각을 내 밥에 얹어주었고, 단 한 번도 야, 너라는 말로 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낯선 이를 대하는 예의 바른 태도, 조곤조곤한 말투와 낮은 목소리를 좋아했다. 손톱 끝의 비누 냄새와 팔꿈치에 조각을 덧댄 오래된 스웨터도 좋아했었다. 


좋았으므로 결혼을 선택했다. 때로는 모든 것이 선택의 방향으로 떠밀려가는 시기가 있다. 그 흐름에 실려 결혼까지 너무 빨리 도달해버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내 의지와 진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해두고 싶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결혼이 마치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싶어 하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빠른 선택을 한 것도, 먼저 후회한 것도 모두 나였다.     


결혼 후에 흐름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 였을까. 

어느 날 실망과 체념으로 쌓아 올린 담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졌다. 그 날은 똑같은 월요일, 똑같은 화요일과 수요일이 흐른 뒤의 완전히 다른 목요일이었을 것이다. 그 날부터 나는 그를 선택했던 이유를 모두 등지고 헤어지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모든 것이 다시 한번 내 선택의 방향으로 흘러주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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