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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ug 15. 2021

어제의 얼굴

그는 긴 식탁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바깥은 낮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집안은 따뜻했다. 조명은 은은하게 빛났다. 거실에서는 어린아이들의 도란대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는 더 자세히 듣고 싶어 조용히 그 행복한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주름진 얼굴 위에 미소가 물감 한 방울처럼 번졌다.     

가족들은 올해의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려고 모두 그의 집으로 모였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오랜만에 아들과 딸이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요리를 하고, 어린 손주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을 고심해서 만들었다. 그는 바쁜 아내 옆에서 잔심부름을 도우며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나이 든 부부는 서로 별 말이 없었지만, 내내 어디선가 콧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설레는 기운은 며칠 동안이나 집안을 채웠다.     


아이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앞세워 도착했다. 양 손 가득 선물을 들고서였다. 그와 아내에게 포근하고 부드러운 머플러가 안겨졌다. 세련된 자줏빛이었다. 같이 둘러보니 근사하게 어울렸다. 그는 아내와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도 손주들을 위해 준비한 장난감을 열었다. 젊었을 때 솜씨를 발휘해 직접 만든 나무 기차와 레일이었다. 꽤 오랫동안 매일 조금씩 다듬고 색을 칠했다. 부드러운 레일 위에서 기차는 걸림 없이 달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린 새처럼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아내는 진작 완성해 둔 털모자와 장갑을 꺼냈다.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빨간색이었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저희들 것을 차지했다. 복숭아 같이 뽀얀 아이의 얼굴은 빨강 모자를 씌우자 모두를 행복하게 할 만큼 예뻤다.      


따뜻한 밀크티를 나누어 마시고 한껏 나른해지니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곁에서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다 큰 자식들의 말소리가 흐뭇했다. 작은애가 책장 구석에서 앨범을 꺼내왔다. 두꺼운 가죽커버를 펼치자 가장 먼저 네 사람이 활짝 웃는 사진 한 장이 보였다.

큰애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이었다. 언제나 모범생이었던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무리 없이 합격했다. 부부는 아이들이 어릴 때 늘 맞벌이로 일했고, 그즈음이 되어서야 하던 일이 자리를 잡아 조금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이들에게는 신경써주기 어려웠는데, 아이가 저 혼자 어려운 공부를 해낸 것이었다. 그토록 믿음직스러운 자식이라니. 그저 고맙고 미안한 일이었다. 사진 속 부부는 여봐란듯이 한껏 웃고 있었다. 커다랗게 피어난 기쁨이었다.  큰애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막내는 눈이 반달이 되어 꿈결처럼 웃었다. 그는 사진 속의 반달눈을 꼭 빼닮은, 기차를 굴리고 있는 어린 손주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때는, 모든 일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은 뒤늦게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욕심이 많지 않았던 만큼 만족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남은 날들은 물결처럼, 흘러가야 할 곳으로 편안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추억을 지나오는 사이 가족들이 들어섰다. 어느새 식탁은 맛있는 향이 가득한 갖가지 요리들로 채워졌다. 차가운 샴페인과 달콤한 케이크까지 완벽했다. 아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자 아이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빙 둘러 자리를 채웠다. 그는 슬며시 아내의 작은 손을 찾아 잡았다. 아내의 고운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옅게 미소가 흘렀다.

다정하고 소란스러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감자요리를 아내가 덜어 내밀었다. 큰애는 그의 잔을 채웠다. 어린아이들은 작은 입으로 연신 재잘거리면서도 맛있게 먹었다. 그의 눈과 귀와 입이 모두 행복했다. 그때 아내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촛대에 촛불을 밝혔다. 그는 곧 타오르는 작은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서 성냥개비가 빠르게 타들어 간다. 작은 불꽃 속의 식탁풍경도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그는 불꽃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보고 싶지만 그러는 사이 검은 개비만 덩그러니 남았다. 빨간 불씨마저 사라지고 가냘픈 연기한 줄이 피어오른다.

어두운 골목길 끝에 앉아 있는 그는, 손바닥 위의 타버린 성냥개비를 내려다보다 주먹을 꼭 쥔다. 고개를 들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상은 검은 어둠에 잠기고 눈송이만 끝없이 떨어진다. 추위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춥다. 그의 초라한 속눈썹 위로 눈이 내려앉아 녹는다. 눈물처럼 눈썹을 적신다.


가슴 안쪽 주머니에는 그때, 큰애의 입학식 사진이 있다. 그는 사진이 젖을까 봐 꺼내지 못하고 손을 넣어 그저 만지작거린다. 마치 아내와 아이들을 만지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은 물결처럼 순순히 흐를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폭풍우가 몰아치고 거센 물살은 그를 휘감았다. 잘 해보려고 했던 선택들에 회사는 부도를 맞고 빚이 쌓였다. 살 집을 잃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큰애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아내와 그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가족은 다시는 한 집에 모일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채로, 각자의 삶을 살아내기도 너무 버거운 채로, 고되어 그리움도 잊은 채로, 세월이 무참히 흘렀다. 폭우 뒤의 구정물처럼 흘렀다.          


그는 젖은 눈꺼풀을 닫는다. 어둠의 어둠 안에서, 지난 일들을 모두 지나 다시, 촛대에 불을 밝히는 아내가 보인다. 다시, 집안의 풍경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다시, 아이들의 간지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가 거칠고 굳은 뺨을 일그러뜨리며 애써 웃어본다.      

    

새로운 해의   아침,  덮인 세상은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어제와 다른  얼굴이다. 길을 가던 여자 하나가 골목 구석에  쌓인 검은 쓰레기봉투가 아니라는  알게 된다. 사람들이 주춤 주춤 모여든다. 경찰이 도착하고 골목 안이 분주해진다. 몇 가지를 확인하고 웅크린 그의 몸이 옮겨진다. 빙긋이 웃는 어제의 얼굴이 얼어붙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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