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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ug 15. 2021

노래도 편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

너무 늦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로, 이제와 이상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어째서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의 얼굴이, 오랫동안 내 정원에 두고 아꼈던 소년의 석상과 몹시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아요. 석상의 얼굴은 좀 더 어리고 어쩐지 더 개구쟁이 같아요. 금방이라도 툭, 짓궂은 말과 웃음소리를 던질 것 같지요. 당신은 그보다 조금 더 입술이 굳게 닫히고 코가 단단하며 눈동자가 커요.     


또, 인간의 땅에서 알몸으로 정신을 잃은 나를 마침내 당신이 발견했을 때, 그리고 얼른 망토를 둘러주며 어깨를 감쌌을 때, 나는 어째서 그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목소리를 잃었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어떤 이유로 생겨 난지 모르는 확신이었지요. 그 완전한 믿음 때문에 나는 두 발이 칼날에 베이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기쁘게 당신과 함께 걸었지요. 당신은 전혀 모르게 한 채 로요.     


이상한 것은 또 있어요. 당신은 오늘도 나를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눈동자는 언제나 깊고 먼 곳에 있지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스러운 여인이 어째서 길에 쓰러져 있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죠. 당신이 입 맞추는 물결 같은 머리카락과 바다 빛 눈동자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죠. 그저 화려한 음식과 옷이나 장신구처럼 처음부터 당신을 위해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것은 갖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말이에요. 나는 당신을 알아갈 때마다 당신 조각을 조금씩 얻는 것 같았어요.

만약 내게 목소리가 아직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무어라고 불렀을까요. 여러 날 낮과 여러 날 밤, 나는 그것만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부를 만큼 좋은 말은 찾지 못했어요. 평생이 한 번 더 남아 있다고 해도 그 말은 영영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바다 세상에서 할머니는 나와 언니들에게 인간의 땅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주었어요. 할머니는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새’를 물고기라고 가르쳐주었어요. 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녀들은 새라고 말해도 알지 못하니까요. 인간들의 숲에는 마른 흙과 곧게 뻗은 나무와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잎들이 있고, 나뭇가지 사이의 작은 물고기, 그 물고기는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고 말해주었지요.

나는 당신의 정원에서 처음으로 노래하는 ‘새’를 보았어요. 그것은 정말 천사였어요. 나는 나무 아래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몰랐어요. 그 새가 할머니를, 그리고 또 다른 천사인 내 정원의 노래하는 물고기들을 너무나도 그립게 할 줄은요. 나는 언젠가부터 새가 두려웠어요. 그리움은 가슴이 온통 녹아내리는 아픔이었으니까요.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말했지요. 사람이 되어 짧게 살고 긴 영혼에 머물고 싶었던 나였어요. 당신과 같은 다리를 가지고 싶어서 나의 지느러미는 미워했던 나였어요. 

“우리 기운 내자. 우리가 살 삼백 년 내내 펄펄 뛰어다니자. 확실히 그걸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하지. 그러고 나서 나중에 평화롭게 쉬게 될 거란다.”

할머니는 인간이 고작 백 년도 안 되는 생을 살면서도 마치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욕심을 낸다고 했어요. 나는 인간에게는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므로, 육체가 사라지는 것은 겁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과 함께 할 영원한 영혼을 꿈꾸었지요.

인어는 삼백 년을 살지요. 인어의 세상에는 지상의 것과 다른, 아름다운 것들이 있지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바다의 생명들이 얼마나 조금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내가 매일 창을 열고 보던  열 중에 하나밖에 되지 않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별 빛처럼 반짝이는 물고기들이 장난을 걸어와도 몰랐지요. 인간의 땅에 있는 당신과, 당신만큼 아름답고 좋을 것들을 상상하느라 그랬어요. 

지금은 할머니의 말에서 다른 것을 생각해요. 확실히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말이에요.     


마녀는 내가, 원하는 것과 함께 반드시 슬픔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어요. 나는 어서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어요. 무엇이든 감수하겠노라고 대답했지요. 세상의 중요한 말들은 가끔 그렇게 지나가버리지요. 마녀는 끝내 내게 어리석다고 말했어요. 

다섯 언니들이 다녀갔어요. 바람이 빗겨주던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바꾼, 작고 날카로운 칼을 내게 쥐어주었지요. 언니들의 얼굴은 몹시 여위어 마치, 그것은 우리에게 없지만, 영혼이 얼마쯤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언니들이 차마 내게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멀리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찌우고, 그것은 우리에게 없지만, 서로의 영혼을 채워주던 시절에 대해서요. 언니들은 어둠 속에서 소리쳤지요. 

우리에게 돌아와. 해가 뜨기 전에.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에게 돌아와. 

그 말은 나만 알아들을 수 있었을 테죠. 누군가는 다친 동물이나 쫓기는 파도가 내는 비명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지금도 나는 언니들의 소리를 들어요. 돌아와 라고 말하는 그 소리를요. 그건 눈물을 가진 사람도 눈물이 없는 인어도 울게 만드는 소리예요. 나는 이제 내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아요.      


오늘 당신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춤을 추었지요. 세상은 처음 선상 위의 당신을 보았던 그날과 다름없었어요. 사위를 물들이는 노을의 색도, 부드러운 바람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퍼져나가는 음악소리까지 말이에요. 눈물 대신에 피가 흘렀지만 발의 아픔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어요. 고통은 가장 높은 곳에서 단번에 추락하는 것처럼 멈추었지요. 그때 사실은, 내 마음의 마지막 빛도 꺼져 버렸죠.

그리고 지금 이렇게, 태양이 수평선 위로 천천히 올라서는 동안, 바다가 붉게 물드는 동안,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아요. 작고 날카로운 칼 끝은 당신을 향해 있지요. 내 손은 떨고 있지 않아요. 그 칼이 닿아야 할 곳에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노래도 편지도 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물거품이 되기 전에, 말도 글자도 아닌 이것은 나보다 먼저 사라지겠지요. 여전히 나는 인어여서 영혼을 남길 수 없는 것이 다행이에요. 이 마음이 영혼에 담겨 어딘가를 떠돈다면, 그것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슬픔이 될 테니까요.      


회전하는 여러 마음 중 하나를 선택할 시간이 나에게는 없어요. 내가 선택해 온 것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마지막을 향한 것이었어요.

이야기는 끝이 나요. 나는 동화처럼 아득하게 전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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