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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ug 28. 2021

월요일의 임배우

아이는 방학 동안 매일 영어 듣기 20, 수학 문제집  장을 풀고 있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학습량이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놀기만 하는 것은 학령기의 아동으로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아직 생각하지 않는 아이의 생각을 대신하고자 학부모로서 내가 내린 결정이다.

사실 나는 아이의 교육에 점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건 아이 아빠에게 양육비를 받는 입장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돈을 받으면 내쪽에서도 뭔가를 제공해야 한다.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고 안전하게 키우는 것이 송금하는 자의 요구사항일 테고 내가 받는 돈에 새겨진 나의 의무이다. 어디에나 상도덕은 있다.

아이는 원체 긍정적이고 설득도 잘 되는 편이어서 본인 생각에도 그 정도 양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다 싶었는지 흔쾌히 동의했고, 이 학습 규칙은 방학 첫날 체결되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 아이는 유독 정신을 놓고 노느라, 나도 집안일에 밥 해먹이고 내 책 보고 등등 괜히 힘이 쭉 빠져 잔소리할 짬을 놓치다 보니 이틀이나 공부가 미뤄졌다. 그러나 오늘 못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일의 너에게 되돌아가 내일의 양과 합쳐져 더욱 부담스러운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경고는 여러 번 해두었다.


마침내 오늘이 되었다. 그 애에게 도합 3 일양의 공부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실컷 늦잠 자고 일어나 화기애애하게 같이 볶음밥도 해 먹고 복숭아도 해치우고 난 뒤 나른한 오후였다.  나는 이제 네가 할거 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었고 아이도 끙 일어나 책을 폈다.

일단 영어 듣기까지는 즐겁게 하는 얼굴인 듯하여 나도 마음 놓고 내 책을 봤다. 오늘따라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보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시간도 더 지나있었다. 아이는 이제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한숨 소리가 푹푹 나는 걸로 봐서 지금 분위기 즐겁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기본 연산 문제라 내가 도와줄 것도 없고 괜히 건드렸다가 불똥 튈 수 있으니 나는 그냥 조용히 내 책을 계속 보기로 했다. 잠시 후 아이는 안절부절 제 방을 갔다 왔다 하는 것 같더니 다시 좀 조용하다. 한참 있다 쓱 보니 어째 고개는 푹 숙이고 연필 쥔 손은 미동도 없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아이를 불렀다. 못 들은 척 하기에 몇 번을 부르자 아이가 자체 슬로모션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애의 콧대에 걸린, 너무 커다래서 여기서도 안 보일 수 없는 눈물 한 방울. 내가 울고 싶은 애 뺨을 때려버렸다는 걸 나는 찰나에 깨달았다.

나는 모든 상황을 삽시에 이해했지만 짐짓 의아한 얼굴로 최대한 다정하게 왜 우냐고 물었다. 이 세상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 왜 우냐고 아는 체 하면 그때부터 여기 보시오 하며 폭탄 울음이 터진다. 아이는 더 어린아이 얼굴이 되어 으앙 울어버렸다. 나는 좀 웃겨서 삐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금니에 가두고 더 동그란 눈으로 왜 울어? 를 반복했다.


 우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  때는 그까짓  몰아서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밀린   번에 하려니  이건  앞이 캄캄하고 속은 답답하고 갑자기   억울하고 이건 뭐야 봐도 모르겠고 문제는  이렇게 많아 풀어도 풀어도 줄지도 않고 저기에 앉아 책이나 보고 낄낄대는 엄마는 얄미워 죽겠고 세상이  싫고 덥고 목도 마르고 아놔 나는 이걸  해야 되나  인생은 이게 뭔가 싶고  속에서 뜨거운  차오르는데 엄마가  이름을 부르니 억눌린 분노와 슬픔의 버튼이  눌려버린거겠지. 그런데그거그냥공부존나하기싫은 거야..

다 알지만, 너무 알지만 나는 맑은 눈으로 좀 어리둥절한 척하며 교육자와 양육자의 목소리와 어휘를 사용하여

“J~막상 하려고 하니 너무 많아서 힘드뤄~? 그러니까 엄마가 어제도 그제도 말했지~ 미루면  힘들어진다고~  봐아~. 매일 조금씩 하는  훨씬 좋지이? 그럼 오늘은 !별히 남은  이따 자기 전에 엄마랑 같이 해보자아~. 지금은 거기까지 하고 마음 가다듬고 쉬어어~.” 라고 말했다.

아이는 마치 천사라도 영접한 듯 감격해 마지않은, 이제는 행복의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반짝반짝 바라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그 애의 눈물을 닦아준다.


엄마가 돼서 이것저것 능력치가 엄청 생겼지만 그중에 제일은 연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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