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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Sep 02. 2021

화요일의 강선배

느닷없이 고백하건대,

나는 천둥이 치면 방의 이중창이 깨질까 봐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고 태풍 바람이 현관을 흔들면 그 문이 금방이라도 열리고 검고 큰 어떤 것이 물을 뚝뚝 떨구며 내 집안으로 들어설까 봐 덜덜 떠는 사람이다. 차에 주유할 때 혹시라도 오작동으로 기름이 넘쳐버릴까 봐 '가득'으로 주유하지 않고, 새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싱크대 배수구에서 혹여나 알 수 없는 벌레들이 기어오를까 봐 하루에 한두 번씩 뜨거운 물을 끓여 붓고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걱정 불안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이 불편한 상상들은 대부분 누구에게도 비밀이다.


나의 유일하고 소중한 동거인인 아이에게는 비밀을 꽁꽁 숨기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들켜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 애에게 많은 순간 대범하고 쿨한 척하려고 노력하지만 완벽할 수 없다. 같이 산다는 것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숨길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를테면 얼마 전 아이가 무심코 열어둔 창으로 밤이 되자 방충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략 2-5mm의 날벌레들이 미세망을 통과하여 방안 전등 주위로 수십 마리 모여들어왔고, 어디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몸이 뚱뚱하고 새끼손톱 만한 풍뎅이나 방구벌레 같은 초록 벌레도 윙윙 날아다녔다. 나는 벌레를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 광경을 마주하자 머리가 띵하며  거의 기절할 뻔했다. 내 비명에 아이가 달려왔다.

공포는 어떤 체면이나 나이나 지위를 순식간에 갖다 버리게 한다.

나는 말했다. "니가 좀 잡아줘"

아이는 다소 어이가 없는 눈으로 나를 본다. "엄마가 나보다 어른인데 엄마가 잡아야지."

"그런 법이 어딨어. 너 숲유치원 다녔잖아. 난 안 다녔어. 거기서 벌레 많이 만져봤다며. 그거 내가 보내준 거니까 배운 대로 좀 해봐."

나로서는 지금도 너무나 타당한 변론이었다고 생각한다. 해본 놈이 해야지.

아이는 아이답게 내 팔에 꼭 매달려 있으면서도, 나를 약간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묻는다.

"에프킬라 어딨어?"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날기도 하고 빠르게 기기도 하는 초록 벌레를 고이 잡아 창 밖으로 방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암묵 동의하며 나는 아이가 찾는 에프킬라를 신발장에서 찾아 작은 손에 쥐어주었다. 애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친절하게 분사구를 스스로에게 향하게 하는 실수는 저지르지는 말라는 충고를 하며 격려의 뜻을 담아 등을 두어 번 두드린다.

"엄마 맞아?"

"다른 엄마 노릇은 하잖아. 빨리해"

그때 벌레가 파드닥 움직이자 나에게 곧장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리털이 쭈뼛 선다. 나는 절제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목도리 도마뱀처럼 팔다리를 반원으로 휘저으며 팔짝팔짝 뛰어 방 밖으로 달아난다.


조금 뒤에 아이가 "됐지?" 하며 방을 나왔다.

내가 짐짓 안정된 얼굴로 슬며시 방을 들여다보자 에프킬라를 맞은 벌레는 바닥으로 떨어져 몸을 뒤틀고 있다. 그 주위로 마치 꽃가루처럼 날파리들도 죽어 떨어져 있다. 끔찍한 경련을 눈뜨고 볼 수 없는 나는 방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한다. 구름이가 무슨 일인데, 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어슬렁 걸어 들어가는데 나는 고양이인 그 애가 혹시 바닥의 에프킬라 분자를 핥아 복통이라도 일으킬까 봐 비명을 지르며 그를 막아선다. 구름이는 놀라 냅다 사라진다.


아주 아주 오래 걸렸다. 벌레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기까지는. 나는 방 밖에서 선 채 그걸 노려보고 있었다. 아주 작고 가느다란 다리 하나가 마지막으로 움찔하는 것까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일면 가여운 마음이 들었으나 두려움과 공포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제 처리만이 남았다. 아이에게 사체까지 치워달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나는 길게 고민한다. 이 지점에서 굉장히,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워진다. 여름 내내 무거워서 수박 한통을 사지 못하고 돌아올 때마다 느낀 그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필요가 고작 벌레나 수박 때문이라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치를 너무나 후려치는 것 같아 관두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사십여 년의 세월 동안 나는 벌레를 잡지 않았다. 부모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독립해 살기 시작해서는 애인들마다 고맙게도 왕복 두 시간의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벌레를 잡아주었다. 마음은 넓고 시간은 많고 돈만 없던 시절의 일이다. 우리 참 예쁘게 꼴값을 떨었구나. 그 뒤로는 언니가 고작 두 살 많다는 이유로 징징대는 나를 못 이겨 저도 싫으면서 잡아주고는 했다. 그런 날 밤이면 벌레가 죽은 곳으로부터 가장 먼 구석에서 언니랑 꼭 붙어 잠을 잤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에게도 부탁할 수 없다. 아무도 없다.

나는 벌레의 죽음을 확신하기 위해 좀 더 기다린다. 불을 끈 뒤 방문을 닫는다. 일단 못한다는 결론이다. 지금 나는 너무 놀랐고 시간이 좀 필요하다. 내일 아침에는 용기가 날 지 모르겠다.

아이가 묻는다. "저거 어쩌게?" "내일 치우게" "왜?" "무서워서." 아이가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보던 책으로 눈을 돌린다. 더 이상 문제 삼아주지 않아 다행이며 참 고맙워진다. 아직도 옅게 손을 떨며 나는 이미 평온을 찾은 아이를 부럽게 바라본다.


나보다 서른두 살 어린 그 애는 가끔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현명하다. 나는 이제 내가 가르치거나 도울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얼마전 밤새 구토와 설사를 하던 날에 거의 울면서 정신없게만 구는 건 나였고, 정작 아이는 싹 씻고 이불을 덮고 책을 폈다. 그 애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몸 상태를 묻고 또 묻는 나에게 좀 조용히 해달라며 책을 보면서 안정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눈빛이 믿음직스러웠다. 발만 붙잡고 조용히 기다리자 아이는 오한은 멈추었고 응급실에 갈 필요는 없으며 몸 상태도 돌아왔다고, 이제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 애의 얼굴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조금 수척하고 창백했다. 그래서 순식간에 다 큰 것처럼 보였다. 너 아홉 살 아니지,라고 물을 뻔했다.


아침마다 늦잠을 깨우고, 다그치고, 옷을 입히며 실랑이하고, 숙제 점검을 하고, 과자 부스러기 흘리지 말라고, 밥 좀 부지런히 먹으라고 잔소리를 할 때 나에게 그 애는 여전히 어린애지만 때때로 동지 같고 선배 같고 그렇다. 나는 고구마가 탔을 때도 그 애를 부르고 구름이 발톱을 깎기 위해 그 애를 부르고 바깥 큰 소리에 놀라도 그 애를 부른다. 왜그러는 걸까 애한테.

나는 그냥 그 애가 옆에 있어주면 내가 어떻게 잘해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날 밤, 벌레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나는 당연히 잠을 잘 못 잤고,

아침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 여봐란듯이,  이런 사람이라는 듯이 어깨를  펴고 코어에 힘주고  걸어 들어가 크리넥스  겹으로 벌레 들을 치웠다.

아이가 깨자  사실을 알렸고, 그는 다 못뜬 눈으로 입술만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했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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