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수업이 모두 끝나고 감금에서 풀려 나듯 아이들이 또 한 번의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며 뒷 문을 빠져나간다. 그날의 당번들은 책가방을 창틀에 줄 지어 두고 책걸상을 모두 앞으로 민다. 굉음이 울린다. 휑하게 드러나는 교실 뒤 시멘트 바닥을 쓸고 닦은 뒤에는 집기를 전부 뒤로 밀어 앞 바닥을 청소할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었던 아이들과 나는 뒷 문 옆에 걸린 거울 앞으로 모여든다. 나무 테두리가 밝게 바래고 금색으로 새겨진 축 발 전의 글자가 흐릿하게 지워진 거울 속에 네 명의 아이들의 상반신이 한꺼번에 터질 듯이 담긴다. 우리는 아침에 교문에 들어서며 무릎 아래로 내려두었던 교복 치마의 허리춤을 서너 번 둘둘 말아 올린다. 무늬 없는 하얀 양말을 벗고 나이키나 아디다스 로고가 크게 그려진 양말로 바꿔신거나, 꼬리빗을 꺼내 신중하게 가르마를 타고 핀을 꼽거나 머리띠를 해본다. 컴퓨터 사인펜으로 아이라인 그리는 연습을 했던 아이는 이번엔 딱풀로 앞머리를 이마에 비스듬히 고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끈을 조여 거북이 등처럼 바짝 책가방을 올려 메고는 걸상을 하나 끌고 와 차례대로 올라 하반신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살색 스타킹의 올이 나가지 않았는지, 치마가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았는지, 어제보다 다리가 굵어진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어때? 괜찮아? 어, 예뻐. 빨리 내려와, 나도 좀 보자, 잠깐만. 한바탕 왁자지껄 속에서도 질서 있게 절차를 마치면, 비질을 하는 당번 아이들과 신나게 인사를 나누고 비로소 뒷 문을 빠져나간다.
우리 집은 학교 뒷문에서 삼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하교하고 집으로 바로 가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2킬로미터쯤 걸어서 J의 집으로 갈 참이다. 그즈음 그 애의 엄마가 얼마 전 두 번째 결혼을 끝내서 새아빠와 이복오빠가 이사를 나갔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집이 비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 씩 짝을 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지만 서로의 수다에는 모두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떠든다. 가끔 팔짱 낀 둘이서 작게 속삭이기라도 하면, 반드시 다른 아이가 둘이서만 말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주로 그 타박을 듣는 것은 L과 나였다.
집으로 향하고 있어서였는지 우리는 그 길에서 대부분 집안 얘기를 했다. 어제저녁에 엄마 때문에 너무 짜증 난 이야기, 아빠의 무관심, 주정, 언니랑 싸운 일, 동생이 얄밉고 귀찮은 일.. 네 집에서 발생되는 에피소드는 끝이 없었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사건이 다른 아이의 비슷한 일화를 불러오는 식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늘 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온도로 분노하거나 억울해했고 같은 지점에서 웃음이 터뜨렸다. 맞아 맞아하는 추임새는 이야기 사이를 촘촘히 메웠다.
그때의 나는 그중에서 에피소드가 가장 빨리 떨어지는 애였다. 그래서 주로 열심히 듣고 진심 어린 반응을 했다. 때때로 어째서 나에게는 이혼한 부모도, 그악스러운 형제도, 기가 막히는 가난이나 절절한 서러움도 없는 것인지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