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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ul 15. 2021

scene of 1995-1

직사각형의 시멘트 교실에 남색 교복을 입은 오십 명의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나는 그중 하나였다.

낡은 나무 미닫이 문이 종일 덜컹거리고 벽에는 먼지가 까만 선풍기가 높이 매달려 있었다. 누구라도 한문 선생인 줄 알아볼 것 같은 한문 선생은 신나게 한자 획을 긋다가 분필로 자꾸 삑사리를 냈다. 신경질적인 생물의 비명 같은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여자애들 몇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또다시 거침없이 갈겨지는 칠판의 한자 획들을 아이들은 긴장 속에 숨을 죽이고 노려보았다.

마침내 엘리제를 위하여 선율이 거칠게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면, 아이들이 일제히 걸상을 밀고 일어나느라 교실은 한순간 공사판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선생은 꿋꿋하게 몇 마디를 더하고는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L은 나보다 키는 컸지만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작았다. 머리숱이 적은 지 자꾸 갈라지는 앞머리를 고르게 매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전부 똑같은 교복을 입었지만 그 애의 몸매는 굴곡이 또렷해서 눈에 띄었다. 딱 맞는 재킷에 도톰하게 솟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 곧고 긴 다리를 가진 그 애의 뒷모습을 나는 자주 눈으로 따라다녔다.

L 쉬는 시간이  때마다 재빨리 일어나  앞자리의 내게로 왔다. 한문 존나 짜증 , 그런 말들로 대화를 시작했다.  애는 내가 귀여워서 좋고, 똑똑해서 좋다고 묻지 않은 말을 했다. 나는 그냥  애보다 키가   작고 시험 점수가 약간 높을 뿐이었다.

L이 내 자리에 와서 얘기를 시작하면 두어 명의 여자애들이 더 모여들었다.  수업시간 내내 컴퓨터 사인펜으로 아이라인을 그려본 아이가 본인의 팁을 알려주기도 했고, 간 밤에 남자 친구와 데이트한 아이가 아파트 단지 구석에서 뽀뽀한 얘기를 실감 나게 들려주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면 어디서 무얼 하고 놀지에 대해서도 매번 진지하게 의논했다.

쉬는 시간은 언제나 부족해서 다시 스피커에서 지저분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도 아이들은 다음 과목 선생님이 앞 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칠 때까지 아랑곳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책상 두 개를 붙이고 넷이나 다섯이서 도시락을 먹었다. 가끔 단짝이 결석했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다투고는 같이 먹자는 제안을 하는 아이의 의자도 흔쾌히 끼워주었다.

도시락을 진작에 까먹거나 선채로 잽싸게 먹어치운 남자애들이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버리면, 교실 안에는 대부분 느긋하게 밥을 먹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말로써 나누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여자애들이 남았다. 남의 흉을 보고, 어제 했던 드라마와 가요 톱 10, 집안일, 연애, 공부, 몸의 변화와 마음의 움직임, 오해와 변명과 충고와 비밀까지 우리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몽땅 말로 만들어 냈다. 매일 같은 점심시간에 비슷한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수다의 소재만은 언제나 새로웠다. 한낮의 네모난 회색 교실은 열몇 마리의 새들이 양보 없이 지저귀는 듯한 소리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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