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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Feb 19. 2022

집에 갈게,라고 말했다.

아빠가 사업의 꿈을 안고 명예퇴직을 감행하고 엄마는 느닷없이 숙박업을 시작하기로 했다며, 우리 가족은 지방으로 모두 이사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그 결정이 얌전치 않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나와 친구들은 제각기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고도 매일같이 방과 후에 만나 동네를 배회했고, 주말마다 치장을 하고 사거리 커피숍에 모여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게 전부였지만 어른들은 우리를 날라리라고 불렀다.

무엇이라고 불리든 나는 친구들을 사랑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모든 밤을 새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넘쳤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저마다 절실했다. 우리는 미운 것을 같이 미워하고 좋은 것을 같이 좋아했다. 서툰 연애와 터무니없는 꿈을 지지했다. 누군가의 문제는 곧 모두의 것이 되었고, 같이 골몰하다 보면 가장 마음에 드는 해답을 찾거나 더는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가족의 이주를 막을 방법도 없었다.    

  

서울에서 뒤늦게 전학 오는 고등학생이 드문 일이었던 새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창가로 아이들이 몰려와 나를 구경했다. 맞춤이 늦어져 얼마간 서울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 했는데, 내 체크무늬 에이치라인 치마는 회색의 후레아 치마들 속에서 너무 눈에 띄었다. 내가 나타나는 곳마다 아이들은 서울 교복이라며 수군댔다. 창피하고 소외감도 느꼈지만 얼마의 우쭐함도 있었다. 그중 어떤 마음도 새로운 적응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동생과 나에게 따로 작은 아파트를 구해주고는 일이 바빠 집에 거의 들르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고인 물처럼 고요했다. 소란하고 넘실대던 세상에서 꺼내져 갑자기 침묵 속으로 던져졌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자 생기도 활기도 사라졌다. 좁고 단단한 문제들 속에 벗을 수 없는 갑옷을 입고 갇혀있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떻게든 있어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마음잡고 공부해  대학생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막 겨울이 시작되었고 나도 회색 후레아 치마를 입었다.      


너 2반에 전학 온 애지, 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학교가 끝나고 혼자 가던 길이었다. 그 애는 깡마르고 얼굴이 하얗고 앞머리가 삐뚤빼뚤 했다.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다. 앞머리 니가 잘랐어? 그 애를 물끄러미 보던 나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 애가 멋쩍게 웃으며 제 머리를 만졌다. 우리는 같이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각자 다른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서로에게 보일 듯 말 듯 우리는 손을 흔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아이가 죽었다.    

 

오래전부터,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다. 국민학교로, 중학교로, 아이가 가는 곳마다 따돌림은 따라왔다. 어느 날 아이는 팩소주를 마시고 아파트 옥상에 올랐다. 소문들이 모르고 싶은 이야기까지 내게 전해 주었다. 

그 애 자리에 국화꽃이 쌓였고 묵념을 했고 책상이 치워졌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대로 두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친구가 되었을 거라고, 갈수록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막 눈에 익어가던 모든 것이 다시 처음처럼 낯설었다. 있어보려 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별안간 내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조급해진 것은, 아마도 그런 방식으로 슬펐기 때문이다.


아직 새 교복에 미처 구김도 없는데, 나는 그걸 입고 아침에 집을 나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그리고 공식적인 가출소녀가 되었다.     

전에 살던 동네로 돌아와 두 평쯤 되는 고시원의 방 하나를 빌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시급 1500원. 하루 여섯 시간 일하면 구천 원. 한 달에 이십오만 원 정도 벌었다. 그걸로 고시원비 차비를 하면 남은 돈이 없었다. 일하는 곳에서 하루 한 끼는 해결할 수 있었다. 쉬는 날에 친구들이 집에서 반찬과 김치를 갖다 주고 사발면을 몇 개씩 안겨주고 갔다. 

엄마 아빠와 전화기를 붙들고 끝없는 싸움을 했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서 돈을 벌겠다 했고 엄마는 화를 냈다. 아빠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맞섰다. 출석일수가 부족하니 이제 자퇴서를 써야 한다는 학교 연락을 받고 나서야 부모님은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르바이트했던 곳은 닭갈비와 순대볶음 같은 음식을 파는 큰 식당이었다. 순대볶음이 유명한 동네여서 안 그래도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자주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었다. 다들 교복을 입고 서빙을 하거나 철판을 닦았다.

일고여덟 명의 또래들이 함께 일하던 저녁시간에는 대부분 술을 마시는 손님이었다. 사모라고 불리던 사장의 부인은 우리 중 가장 예쁘장한 아이에게 문밖에서 호객행위를 시켰다. 나가기 전에 꼭 치마도 한단 더 걷어 올리라고 했다. 나는 그 애가 슬렁슬렁 말 몇 마디하 고도 똑같이 돈을 버는 것 같아 내가 좀 더 예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이 그리워 돌아왔는데 전과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학생인 친구들은 신분이 달라진 나와 점점 만나기 어려웠다. 모두 떠난 자리에 뒤늦게 도착한 것 같았다.

11호실. 내 작은 키에도 꽉 차는 침대 왼쪽으로 옅은 하늘색 커튼이 달린 창문이 있었다. 창이 있는 방은 삼 만원이 더 비쌌는데도 나는 그 방을 고집했다. 겨울에도 밤마다 창을 열어 두었다. 별도 없는 밤. 고양이도 울지 않는 밤들이었다.     

 

오층의 사장 집에서 무거운 물통을 어깨에 이고 아슬아슬한 옥외 계단을 내려오면서, 말도 더럽게 안 듣는 사장 아들을 학원이며 오락실이며 앞치마를 매고 찾으러 다니면서, 이거 한 병만 더~ 하며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는 얼굴이 벌건 아저씨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 애쓰면서, 오 분 지각했다고 한 시간 시급을 깎는 사모한테 욕 안 하려고 입술을 깨물면서, 열아홉 살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 마감까지 일하고 소주를 한잔 마시고 아침이 다 밝아 집으로 돌아오던 날, 꼭 내 친구인 것 같은 애가 단정하게 차리고 어딘가 서둘러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며칠 동안 나는 그 뒷모습을 생각했다. 생각하다 보니 생각 속에,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득 찼다. 다들 엇갈리고 스치며, 그러나 각자 가야 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갈 곳을 아는 걸음, 그곳으로 가고 있는 뒷모습을 갖고 싶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갈게,라고 말했고 엄마는 아직 잠이 덜 깬 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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