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별거 중이다. 나는 졸지에 별거 선배가 되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세상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별개이듯 그들 부부에게도 완전히 개별적인 지나온 사건들이 있다.
여자는 이렇게 살다가는 언젠가는 내가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내릴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에 이르렀을 때 별거를 결정했다. 아이가 하나 있고 아이를 데리고 근처 다른 집을 얻어 옮겼다. 남자는 일주일에 두세 번 아이를 방문했고 고 주말에도 대체로 셋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남자에게는 이렇다 할 유책 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대화 성향이 맞지 않고 자주 여자를 탓하며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여자는 늘 남자와의 대화를 힘들어했다. 강압적인 측면도 있어 겁이 많은 여자가 두려움을 느낀 지도 오래되었다. 남자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내가 뭘 했기에 싫다고 난리야?’ 그는 사람이 사람을 불편해하고 싫어하게 된 데에는 좋아하게 된 일보다 더 설명하기 힘든 세월과 순간들이 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그는 싫어하는 마음에 대한 이해를 거부한다. 어떤 얘기를 해도 변명할 준비가 되어있으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설명 설득하기를 지레 포기해 버린다.
문제는 별거가 1년이 넘어가자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돌아올 것을 요구하고 여자는 별거 유지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아이가 그립다며 별거를 거부한다. 둘이 원하는 것이 다르니 지난한 싸움이 이어지고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자’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이혼은 둘 중 누구도 원하지 않았는데도 현재 가장 가까이 와 있는 결말이 되었다.
어리지 않은 아이는 일 년 내내 모부 양쪽에 팔이 하나씩 잡혀 이리저리 당겨졌다. 혼자 지내는 아빠가 가엾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가도, 아빠의 어떤 점은 본인도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때문에 일면 엄마의 결정이 옳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혼하지 말아 달라고 읍소한다.
여자는 운다. 내가 살려면 이혼 밖에 답이 없는데 아이를 보면 나 죽었다 생각하고 다시 합가해야 하는가, 내게 묻는다. 이혼의 힘든 과정 없이, 지금처럼 별거를 이어가는 일이 남자는 왜 싫다고 하는지 여자는 알 수 없다. 여자는 말한다. ‘너처럼 살고 싶다.’
나처럼? 이혼 없는 평화로운 별거 생활을 하는 나 말인가.
나는 내가 특별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의 말에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이렇게 살게 되었나, 이 생활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가. 정리해 본다.
1. 전부 잊는다. 잊은 척한다.
산뜻하고 따스한 이별은 없다. 그래도 이별이라는 것은, 제대로 치르고 난 뒤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그러나 별거의 경우는 다른 이별과 다르다. 부부 관계는 종결되었지만 유지하고 유예되는 것들이 남는다. 완전히 마무리 지을 수 없는 결별이기 때문에 까딱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상처는 상처대로 끌고 가고 새로운 시작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잊어야 한다.
결혼 생활을 하면 각자의 구석구석을 감출 수 없다. 졸렬하고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못난 모습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 모두 들키거나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 내보인다. 민낯끼리 좁은 집에 붙어살면 필연적으로 불화와 충돌이 발생하고 그걸 잘 수습할 수 없었던 관계에서는 머지않아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틈을 잘 메우며 수십 년을 가까스로 함께 가는 부부도 많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별거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별거는 결혼이나 이혼, 재혼만큼이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일이면서도 과거의 잔재를 여전히 간직한 자들의 껄끄러운 잔여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가장 먼저 과거 청산이 필요하다. 나는 별거를 시작하며 스스로 새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려면 지울 수 없는 상대를 대신 새롭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밉고 실망스러웠던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폭언과 욕설이 왜 없었겠는가. 별거하기까지, 가열차게 싸울 시기에는 서로를 탓하고 우기고 분에 못 이겨 상스럽고 험한 말들을 칼 날리듯이 주고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얼마 전 휴대폰 사진첩 속에서 발견했다. 당시 우리의 욕설 섞인 대화가 고스란히 담긴 캡처 사진이었다. 나는 비명 같은 짧은소리를 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그도 나도 아니었다. 그들의 말은 끔찍하고 낯설고 우스웠다. 나는 내가 이 이 시간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웃고 밥 먹고 여행 가고 대화할 수 있었구나.
아마도 더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면 모조리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그것들을 계속 기억했다면 나는 그때의 나로 머물고 그도 그때의 그가 될 것이다. 억울하고 밉기 때문에, 따지고 싶고 사과받고 싶고 정정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그와 싸우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별거하고 있는 사람은 그때의 그와 다른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하고 처음 보듯 해야 새로운 관계에 대한 계획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다. 모두 잊어야 한다. 혹시라도 기억이 소환되어 버렸다면 그것마저 잊기 위해 잊은 척해야 한다. 신기한 일은 잊은 척 하기 시작한 기억들은 어느샌가 흐려진다.
2. 솔직해진다.
나는 별거 사실을 주위에 숨기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지인, 모임에서 간혹 보는 선후배들에게까지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사사로운 순간마다 어색한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였다. 거짓말하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뭔가 잘못한 사람, 잃은 사람,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에 나는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으면 싶으면서도 동시에 누구라도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일에 길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처음에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몇 마디 격려를 한 뒤에는 똑같다. 내 이야기를 지나치면 곧 다른 친구들의 남편과 남친 얘기로 수다가 이어졌고, 갈수록 그 대화들이 아프고 부담스러워진 나는 모임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 다른 가정들은 어쩌면 그렇게 재미있고 따뜻한지,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다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간간히 힘을 얻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때마다 한 번씩은 나를 부러워한다는 점이었다. 우리 엄마는 '아이고, 이 멍충아, 그냥 하는 말이지 그걸 믿어?' 했지만 나는 그 부러움을 믿었다. 어느 집에서나 아내와 엄마로서의 한 여자는 늘 힘들고 지친다. 마음과 몸에 과중한 할당량을 지니고 산다. 나는 그로부터 대부분 벗어났다. 남편과의 마찰, 무시, 시중과 집안일, 명절 스트레스, 부부 관계에 대한 부담 등이 사라진 내 일상을 사람들은 꼭 한 번씩은 믿기지 않은 듯 부러워했다.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부러움들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산책길에서 사이좋게 걷는 부부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던 중이었다. 엄마가 '울타리도 없이 어떻게 살래' 할 때마다 속으로는 정말로 겁이 나 눈물이 솟던 중이었고, 아직 꼬마인 아이를 꽉 껴안으면 죄인이 된 것 같아 미안하기 이를 데 없고, 그러던 중이었다. 그럴 때 나를 부러워하는 말을 들으면, 내가 벗어난 것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었다. 전처럼 살았다면? 똑같이 다른 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부럽고 아이에게 미안한 다른 이유들이 있었을 테고 이 사람과 끝까지 가는 건가? 싶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얻은 것이 있으니 내가 완전히 진 게임은 아니라고, 어떤 이들은 나를 부러워하지 않느냐고, 정신 승리에 가까운 자기 위로를 했다.
사람들에게 솔직한 만큼 내게도 솔직할 필요가 있다. 누가 지금 내게 '괜찮은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오늘은 괜찮다'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은 이 글을 쓰고 있으므로 괜찮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혼자 서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새벽까지 영화 한 편을 볼 때는 괜찮고, 잼 뚜껑이 안 열리거나 밤늦게 현관 바깥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거나 아이가 아빠를 더 자주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날에는 안 괜찮다. 왔다 갔다 한다. 너무 좋을 때도 약간 아쉬울 때도 있다. 작은 배를 타고 있다.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다. 모든 배는 다 흔들리면서 간다고 생각하면서 노를 젓는 것이다.
3. 엄마와 아빠,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한다.
별거로, 서류에 붙은 이름만 빼고 두 사람은 영원히 쪼개졌다. 그러나 아이가 있으므로, 아이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모이고 분담하고 협동하고 교류해야 한다. 한쪽은 육아, 다른 한쪽은 경제적 지원을 담당할 수도 있고 모든 영역을 둘이서 공평하게 반씩 분배할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가정 상황에 맞게, 두 사람 모두 합의하에 책임 영역을 나누어야 한다.
일단 이건 내가 저건 네가 하기로 정했다면 약속된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한다. 아이가 있어서 이혼 대신 별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경우라면 이 관계의 존재 이유인 아이에 관련된 사안만은 언제나 편하게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책임 영역은 분명히 나누고 주기적인 대화를 통화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 집의 경우, 아이에 대한 모든 양육의 책임을 맡은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으로 아이를 먹이고 입하고 가르치고 챙기려 한다. 아이 관련 크고 작은 문제와 결정 앞에서는 그에게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조언도 구한다. 그것은 내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명이고, 아빠로서 그의 정당한 알 권리다. 대신에 그는 양육비 등 경제적 부분을 모두 담당한다. 더불어 각 계절이나 시기에 맞는 여행이나 운동, 나들이 등 가족 활동, 정기적인 일요일의 만남 등도 그가 맡은 역할에 속한다.
만약 우리 둘 중 하나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나는, 물론 결혼 생활 중에도 눈치가 보여 내 생활을 잘 갖지 못했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부터는 저녁 약속, 주말 약속이 거의 없다시피 하거나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아직 30대이고 미혼의 친구들도 많아서 나도 사실 놀고 싶은 적 많지만, ‘빌미를 주기 싫다’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제는 동료가 된 그에게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받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별거는 어쩌면 더 과중한 임무를 가져다 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만은 가볍다. 마음이 편해져서 임무들이 한결 수월해졌다.
4. 상대를 인정, 존중하고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책임 영역을 나누었다면 상대가 맡은 그 일을 존중한다. 돈 버는 게 뭐가 대수라고, 애 키우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런 말은 이미 별거 전에 할 만큼 했으므로 더 이상 의미 없다. 그는 나를 자극할 때 아직은 내 영향하에 있는 아이를 염려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를 공격하며 다음 달 양육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 준다.
물론 속이 뒤집히는 때가 없지 않다. 요리를 잘 못하는 내게 ‘애를 제대로 먹이지 않는다’고 주눅 들게 하거나 어떤 면에서 강박에 가깝게 깔끔을 떠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내가 참 싫어하는 방식으로 할 때, 여전히 속에서 불꽃이 일며 화가 난다. 그래도 매일이 아니고 오늘 단 하루, 지금 이 순간만 참으면 되니까 참는다. 매일 함께 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렇게 참다 보니 점점 밀려 나오는 원망의 말을 입술을 다물어 꾹 참을 수 있게 되었고 차츰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는 일에서 벗어났다. 도저히 안될 때는 생각한다. '그래도 결혼 생활 보다도, 이혼보다도 낫지 않나?'
수고가 많다고. 당신 같은 아빠는 많지 않을 거라고. 나는 일단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다음 생각을 말로도 해본다. 처음엔 립서비스 같지만 하다 보면 정말로 고마워진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는 아이 뭘, 쑥스러워하면서도 만족스러워한다. 그는 어쩌다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내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나는 최대한 그의 사정을 아이에게 좋은 말로 전한다. 또 아이가 아빠에 대해 좋은 생각만 하도록, 이왕이면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그가 없는 평소에도 그에 대해 우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이와 아빠,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것까지도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관계가 다소 형식적이지만 다정한 표현들로 더욱 평화롭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러한 표현들이 부재했기 때문에 메말라 갈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깨닫는다.
따로 살면 번거롭게도 같이 살 때보다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정보가 없고 표정과 행동과 같은 무언의 언어들을 교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말로써 전달해야 한다. 각자의 역할 수행에는 각자의 고충이 있다. 나는 때때로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매일이 부담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일상이 답답하고 아이만 바라보다 나이 먹는 삶이 두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는 가끔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외로움을 느낀다고 털어놓는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묻고, 고민과 걱정을 이야기한다. 그는 내게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를 가져보라고 권하고, 나는 그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진심으로 조언한다. 그는 아이의 아빠이다. 나의 무엇은 아니다. 그가 아이에게 자신의 역할과 마음을 다 하는 채로 자신의 인생도 행복하게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5.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별거를 하기 위해 가장 선제되어야 하는 중요한 조건이 바로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처음에 언급한 친구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여자는 사랑하지 않고 남자는 아직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다. 미움과 사랑 모두 공평하고 편안한 별거 생활에는 독이다. 게다가 한쪽만 여전히 사랑(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하고 지난한 싸움만 오간다.
금요일 밤마다 그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나는 궁금하지 않다. 별거의 첫 순간부터 그랬다. 그 역시 내가 요즘은 누구와 친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면 우리는 다시 같이 살고자 했을 것이다. 다만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아이에 관한 일이다. 아이와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그 애가 무슨 말과 행동으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는지, 우리는 아이에 대한 소재로만 밤새 얘기할 수도 있다. 아이의 다리가 이 센티미터 정도 길어진 것 같다고 말하면 유심히 살펴본 뒤 정말 그런 것 같다며 반가워하는 사람, 어쩜 이렇게 예쁜 아이가 내게서 태어났을까 하는 낯간지러운 독백에도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그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지만 한 아이를 함께 사랑하기로 한다.
별거는 그와 내가 공정하고 아름답게 합의한 이혼 유예기간이다. 우리는 결국 이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훗날 현명하고 평화롭게 이혼하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할 일이겠다.
이혼의 시기는 '둘 중 하나에게 이혼 서류가 필요해진 순간'으로 구두 합의 해 두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일수 있겠지만 둘 중 누군가에게 혹은 둘에게 동시에 좋은 사람이 생겨 또 한 번 가정을 이루고 싶어지면 이혼할 확률이 높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또 낳지 않는 쪽으로 하자는 것도 잠정 합의했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오랜 직장을 퇴사하듯, 오랜 동료와 작별하듯, 시원 섭섭하게 헤어질 것이다. 다정한 악수를 나누고 고생 많았다고 또 보자고, 돌아설 수 있을 것이다. 오 년을 해왔고 얼마간은 더 이어질 이 별거를 벗어나 이혼을 맞으면, 나는 또 어떤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될까. 모든 새로운 시절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혼을 생각하면서도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