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은 엎질러진 물과도 같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

by 서해

떠 다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자

내 안에서 하고 싶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브런치에 글도 쓰고,

바다 여행도 실컷 다니며

마음을 정비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채워지지 않았다.

'일을 하고 싶다'는 그 욕구.

그걸 채우기 위해 이직도 시도해 봤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자리와

제안이 오는 자리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즉, 내 경력이 꼬여 있었던 거다.


임신을 마음먹던 시기부터였을까.

휴직 후 복직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둥둥 떠 있던 시간들이

내 커리어의 색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아—이게 말로만 듣던 ‘물경력’이구나.


과거의 성과보다

최근 맡았던 업무에 더 주목받았고,

주특기도 아닌 일들로 제안을 받으니

나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원하는 곳마다

술술 합격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력은 엎질러진 물과 같았다.

되돌릴 수도 없고, 탓할 대상도 없다.

가진 것들로

부딪혀 보는 수밖에.


반년 동안 꾸준히 지원했다.

새벽마다, 주말마다

이력서를 쓰고 인성검사를 하고,

떨어지면 잠시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회사에서

희망하던 투자팀 면접 제안을 받았다.


아이 등원까지 고려하면

거리부터 현실적 장벽이었다.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걸어서 15분이면 가는 회사를 뒤로 하고

한 시간을 운전해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에서 투자 경험을 이야기하는 동안

내 텐션이 평소보다 높아진 걸 느꼈다.


‘아, 나 일 좋아하는구나.’

내 마음을 여기서 다시 확인했다.


동시에 부족한 점도 선명하게 보였다.

론칭했지만 접었던 사업들.

수백 건의 투자 검토 중 성과로 이어진 건

손에 꼽힌다는 사실.


아… 부족하구나.

하지만 그 부족함을 ‘내가 직접‘ 마주 하였으니

이 면접은 큰 선물이었다.


건물을 나오며 상상해 봤다.

이 회사에서의 나.

신생팀에 가까운 공기,

내가 입사했던 그 시절과 비슷한 분위기,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기획일도

같이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


“이 자리... 괜찮을까?”


하고 싶은 일을 만난 반가움과

결국 조직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불확실성,

모두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꼭 회사에서만 해야 하나?”


그 무렵 나는 대학원도 알아보고 있었다.

회사라는 계급장을 떼고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면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한 시간 반 운전 덕인가.

이직과 대학원 병행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대학원을 포기하는 쪽이

더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마음은 명확해졌다.


영혼 없이 준비하던 이직과 달리

대학원 전공 정보를 찾는 건 즐거웠다.

그 공부를 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2년 뒤 졸업한 나를 상상하면

괜히 가슴이 뛰었다.


대학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길 기대하진

않는다.

그저, 지금 보이는 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내 시야 속에 확실히 새기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대학원 면접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