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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Feb 22. 2020

술과 이별한 지 3개월째.

작은 시리즈: 달라지는 것들_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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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에 들어서서 치즈와 우유가 가득한 신선코너를 돌아, 수십 가지 과자가 있는 코너를 가볍게 건넌다. 조금 깊숙하게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와인과 맥주가 있는 코너로 경쾌하게 걸어갈 때면 알코올 병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함께 리듬을 맞추며 다가갈수록 가슴 저 밑에서부터 이상하게 뿌듯함이 올라온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거다. 대형마트 한 코너 전면을 꽉꽉 채우고 있는 알코올들을 볼 때 얼마나 배부른지. 어떤 친구들이 새롭게 들어왔는지, 어떤 친구들이 세일을 맞이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만나기도 전에 벌써부터 우리 집 테이블에서 마주할 시간이 기다려진다.      


점점 다양해지는 수입맥주 코너는 내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하다. 굳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이곳저곳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스페인, 독일, 체코, 라트비아, 덴마크를 돌아 유럽 대륙을 횡단한 기쁨을 누리고 태평양을 건너 미주 대륙의 보물들을 찾아야 한다.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맥주 맛을 볼 때면 이미 나는 여름 한가운데에 있다(내가 즐겨 마신 데낄라와 파타고니아 맥주는 여름에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단지 뜨거운 태양 대신 나는 우리 집 노란 조명 아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맥주 종류를 보며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를 누비는 머릿속 여행을 마치면, 이제 어디서 저녁을 보내고 싶을지를 결정할 와인 코너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도하게 진열장에 놓여 있는 비싼 와인들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다. 이번 주에 어떤 특별한 세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가격이 저렴해진 와인 중에 내 취향을 정확히 대변할 수 있는 와인을 만난다면 그 날 저녁은 이미 성공. 여기서 더 운이 좋다면 자신들이 판매하는 각종 와인을 모두 시음한 소믈리에 스태프를 만나는 순간이다. 물론 개개인이 선호하는 맛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린 안다. 몇 마디 대화 속에 이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지. 그저 믿고 싶은 소믈리에를 만나면 그가 추천해 주는 와인을 선택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마신 와인 중에 실패한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카트 한가득 담긴 여러 나라 알코올 친구들을 볼 때면 나만의 우주가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 약간의 과장을 좀 보탰다.  

     

자자, 와인과 맥주만으로는 우주가 아름다울 수 없다.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집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는 알코올 친구들이 있다. 꿀처럼 달달한 맛과 향이 풍부한 보드카, 마시는 순간 몸이 들썩일 것 같은 카샤사(cachaca). 전용 잔에 따라 놓고 향을 한껏 느낀 다음 마시는 꼬냑. 그리고 친구와 꼭 함께 마시고픈 캄빠리(campari). 내 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그냥 그 모습만을 봐도 든든한 친구들이다. 머릿속에서 이미 어떻게 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지 시뮬레이션만 수백 번 돌렸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 가끔 미안한 마음도 든다. 생각보다 자주 만나지 못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 꼭 만날 거라는 다짐으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왼쪽부터 보드카, 꼬냑, 까샤사(소개하고 싶어 앞으로 꺼냈어요). 살짝 왼쪽 뒤에 키 큰 붉은 몸통 보이시나요. 쟤가 깜빠리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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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나는 그랬다. 3개월 전만 해도 충분히 내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별이다. 얼마 동안 이별을 고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관지 내시경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금주를 결심했다. 그리고 유유육종을 확진받았을 때, 금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은 염증이 낫는데 그리 도움을 주지 못한다.


유육종증이라는 낯선 병명 때문이었을 거다. 처음엔 몸속에 염증이 퍼져 있다는 사실보다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이 더 아찔했다. 금주하기 너무 어려운데, 어떡하지. 그 순간 즐거웠던 술자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술자리의 분위기다. 혼자이든 함께이든. 아아, 나의 즐거웠던 저녁은 모두 안녕이구나. 얼마나 금주를 해야 하지, 약을 먹는 동안은 안 되겠지. 약은 얼마나 먹어야 하는 거지. 아주 조금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아, 삶이 쓸쓸해지는 것만 같았다.      

  

병원에 다녀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마 전에 산 맥주 3캔이 나란히 서 있었다. 심지어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게 아닌가. 자주 가는 동네 편의점 맥주 콜렉션이 훌륭해 거기서 구매한 맥주였다. 아, 내가 너네를 어찌해야 하니. 동생 역시 술을 자주 마시지 않는 편이라, 맥주는 한동안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주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흑흑, 나 대신 즐겨줘.   

   

금주를 시작한 지 2주, 3주 차가 되었을 때가 가장 고비였다. 아는 맛이 가장 무섭다 했던가. 한 병도 아니고 딱 한 모금만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혼술을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 괜히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했고 집안 곳곳에 있는 알코올 병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하필 연말이라 술과 함께하는 모임도 열렸지만 가지 않았다. 몸 컨디션을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해서였기도 했지만, 술을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술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라고 배웠다. 술자리에서의 즐거움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건 잠시 피하는 것뿐이었다.      


‘딸이 술을 못 마시니까 내가 제일 아쉽네’      


새해를 함께 보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딸과 술 한 잔 하지 못하는 걸 무척 아쉬워하셨다. 아쉬운 마음에 사 온 무알콜 맥주로 대신해야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소주 한잔 하지 못하는 게 섭섭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주잔에 사이다를 가득 따르곤, 사이다에서 소주 맛이 나기를 바랐다. 흠, 너무 달았다. 우리는 늘 제사 음식을 하고 남은 밀가루로 전을 부쳐 막걸리를 마셨고 차례가 끝난 뒤 음복을 했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의식이었는데, 당분간은 그 모든 걸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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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한 지 3개월째.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스무 살 이후 가장 오래 금주를 하는 중이다. 3주 차의 그 초조함은 사라진 지 오래, 사실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에는 꽤 덤덤해졌다. 아무래도 한 달에 한번 폐를 덮고 있는 염증을 엑스레이로 확인하기 때문일 거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술을 입에 넣고 싶지 않다. 그동안 마셨을 술이 충분히 염증을 자극했을게 너무나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무섭기도 하다. 술을 조금 마신다고 큰 영향을 주진 않겠지만, 몸에 미안하다.  


만약 어떤 목표를 위해서 금주를 했다면 난 분명 실패했을 거다. 1년에 한 달이라도 간을 위해 금주를 하자는 내 결심은 늘 다른 이유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서, 함께 있는 사람이 좋아서, 분위기가 술을 필요로 하니까, 비가 오니까, 석양이 아름다우니까 등등의 이유를 대면서 나 자신을 설득했던 나이니까.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단념은 쉽게 되었고 평정심은 빨리 찾아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무알콜 맥주도 마시지 않았는데 지난 주말 문득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마트에는 알코올 0.0%가 가장 확실한 하이트 맥주가 없어, 수입맥주 코너를 기웃거렸다. 병 뒤에 성분 부분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세 병을 샀다. 하하, 고작 세병. '알코올 0.0%'이라고 쓰여 있는데도 불안해 사고 싶은 욕구도 상실했다. 사르코이드는 신기할 정도로 알코올(은 정확히 아니지만)에 대한 욕구를 굉장히 낮추었다. 내가 생각해도 놀랄 일이다, 이건.


며칠 뒤 용기를 내어 냉장고에서 무알콜 맥주를 꺼냈다. 맥주는 무조건 컵에 마시는 걸 좋아해 어울리는 컵과 병따개를 준비하고, 그리고 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다시 인터넷으로 내가 산 무알콜 맥주가 '찐무알콜'인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0.04%의 알코올이 포함된 무알콜 맥주였다.


술과 이별한 지 3개월째.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립기는 하지만 힘들지 않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술을 마신다면 난 그걸 질투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별 중이지만 슬프지 않다. 멋진 이별이다. 흠, 사람과의 이별도 이랬으면 참 좋으련만.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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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혼자 또는 같이 들어 보길 추천하는 재즈

Nina Simone “Solitude”

여러 버전이 있지만, 오늘은 니나 시몬의 음색으로 함께. 


하나만 소개하기 아쉬워서. 요즘같이 마음 복잡한 날 조금 신나는 모먼트를 위해!

Quantic & Nickodemus (Feat. Tempo&The Cnadel all-Stars) "Mi Swing Es Trop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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