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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Feb 17. 2020

너의 하루가 궁금해

작은 시리즈:  달라지는 것들, 첫 번째.


S, 뭔 일 있어? 어제도 늦게 퇴근한 거 아냐?

어제도 늦게 옴 ㅠ     


새로운 길을 위한 S와의 스쿼트 100개 100일 프로젝트가 8일 차가 되던 날이다. 잠잘 시간이 다 되어도 S의 인증 영상이 업로드되지 않았다. 슬그머니 S가 걱정되었다. 무슨 일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잠들었나. 다음 날 아침 S는 미처 올리지 못한 8일 차 영상을 올리며, 늦게 퇴근했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퇴근이 늦어서 영상 올리는 걸 깜박했구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날 오후 늦게 만났다. 보고 싶은 영화(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같이 보자 했더니 무엇이든 좋다며 S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S다운 태도였다.


야, 영상 늦게 찍어도 그냥 올려!

JJ가 임신 중이잖아, 혹시라도 늦은 밤에 알림 소리 들으면 좀 그럴까 봐.

아, 그랬구나. 나는 네 영상 안 올라와서 좀 걱정했어. 근데 그렇게 늦게 퇴근해?      


스쿼트를 함께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건 S의 퇴근시간이 꽤 자주, 자정을 향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늦게 퇴근한다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그렇게까지 늦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밤 열두 시 즈음 퇴근해서 집에 가면 새벽 1시. 그때서야 S는 스쿼트 100개를 하고 영상을 찍어 JJ와 내가 있는 단톡 방에 공유한다. 때로는 늦은 밤에 때로는 다음날 아침. 스쿼트를 하는 S의 쾡한 모습을 보면 이 프로젝트가 뭔가 싶지만 S의 말처럼 우리는 약속의 힘에 이끌려 스쿼트를 한다. 둘이서 ‘약속’만 아니었어도 벌써 때려치웠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오늘은 프로젝트 26일 차이다.

      

근데 이렇게 영상 매일 올리는 거 좀 좋은 것 같아.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잖아.

      

정말 그랬다. S의 영상이 약속된 시간에 올라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안 올릴 친구가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S의 하루가 문득 궁금해지고 염려되었다. 매일매일 영상을 올리다 보니 당연하게 영상을 기대하게 되었다. 처음에 스쿼트 영상 업로드는 인증에 불과했지만, 이게 반복이 되다 보니 하루의 시작과 끝이 되고 자연스럽게 일상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S와 JJ와 매일 짧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15년을 함께 지낸 사이기에 굉장히 친하다면 친한 그런 사이인데, 매일 서로의 안녕을 주고받는 게 새롭고 기분 좋게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새로울 것이 있나 싶지만, 찾아보니 또 있다. 해보지 않은 것을 함께 하니, 관계가 한층 더 쌓아지는 것 같다. 참, JJ는 임신 중이라 이번 스쿼트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한다. 대신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 정도를 공유하기로 했다. 물론 컨디션을 봐 가면서(JJ는 하루에 만보씩 걸을 정도로 많이 걷는 편인데, 임신 초기라 쉽지 않다고 했다).

      

근데 매일 그렇게 12시가 다 돼서 퇴근해? 야근이 많은 거야?

아니. 나 종이컵 정리하는데 그게 사무실 사람들 다 나가면 시작하는 거라서...      


사실 S는 거의 1년째 사무실에서 사용되는 종이컵을 정리하고 있다. 사회공헌팀에 소속되어 있는 S는 작년부터 환경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무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고 있는 종이컵이 마음을 잡았던 모양이다. S는 사람들이 모두 퇴근할 즈음, 쓰레기통이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종이컵을 모두 수거해서 이물질을 제거하고 행군 다음 근처 주민 센터에 가져간다. 매일같이 정리하는 S를 보면 주변 사람들이 텀블러나 개인 머그컵을 사용할 법도 한데, 종이컵 사용량은 여전하단다.      


종이컵을 수거하고 정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약 2시간. 그걸 매일 할 S를 떠올리면 그냥 아찔하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 시작할 수 있는 작업이라, 업무가 마치면 개인 일정을 보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단다. 종이컵을 산처럼 쌓아 전시해 보기도 하고 동료들에게 종이컵 사용량을 줄여 보자고 메일을 써보기도 했다지만 종이컵 사용량은 좀처럼 줄어들 생각이 없단다. ‘1인 시위해줄까, 너네 회사 앞에서? 나 전문이잖아.’ 반쯤 장난이 섞인 말로 염려의 마음을 대신 전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오만가지 감정이 S의 마음을 쓸어갔을 것을 생각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밉기도 하고 상황이 짜증 나기도 한다. S가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물론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 웬만한 상황은 잘 넘기겠지만, 그럼에도 반복되는 행동에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찾아오는 헛헛함과 주변에 대한 아쉬움이 쌓이면 외롭고 때론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냥 몰래 그 사무실로 가서 모든 종이컵을 다 회수해서 없애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S가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오는지 뻔히 알고 있으니, S의 영상은 더 귀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피곤한 일과를 다 마치고 스쿼트를 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15년 친구 사이에 매번 달달한 애정표현이 넘나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날 있었던 사건 사고들을 나누며 안부를 대신한다.     


2019년 10월. 바다가 보고 싶다고 찡얼거리는 나를 위해 함께 당일치기로 신도(인천)를 다녀왔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데 풍경이 예술이다.


아프지 않았다면 했을까, 스쿼트 100개. 세상에서 헬스를 가장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과연 누군가와 약속하지 않았다면 했을까. 허벅지에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는 것에 설레는 순간을 맛볼 수 있었을까(자, 여전히 26일 차임을 잊지 말자.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두 눈을 부릅떠야 볼 수 있다). 아마도 어려웠을 거다, 음. 아마도.     


‘안녕, 사르코이드’ 매거진의 1회 제목이 ‘새로운 길은 스쿼트 100개부터’이다. 다행히 그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스쿼트를 하고 있다.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때로는 이걸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영상을 공유해야 할 상대가 있고 약속을 했으므로 어찌 됐든 간에 한다, 오늘도. 수없이 드는 잡생각을 달래고 잠재우면서. 그리고 이 스쿼트 덕분에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친구들과 매일 안부를 묻는다. 짧게 영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그칠 때도 있지만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낼 수 있는 여전함에 만족한다. 오늘도 무탈하겠거니 하는 믿음이 스쿼트 타임랩스 영상이 대신한다. 오늘도 다행이다, 그리고 여전한 나의 일상도.


예전에 K가 그랬다. 큰일을 겪게 되면 달라지는 것들이 있는데, 관계도 그중 하나라고. 처음에는 그럴 수 있겠지 하고 넘겼다. 그런데 유육종증을 알게된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이 시점에서, 나와 JJ, S의 관계는 달라지진 않았지만 한 겹 더 두터워진 것 같기도 하다(나만 그런가. 얘들아!).  그래서 이 스쿼트 프로젝트를 다 마치고 나면 또 다른 프로젝트를 했으면 좋겠다. 그때는 JJ도 꼭 함께.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한 겹 한 겹 새롭게 쌓아갔으면 한다.      


물론, 지금은 우리의 첫 프로젝트를 무사히 잘 마치는 게 가장 우선이겠지만.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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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가 스쿼트를 하면서 듣는 음악을 공유해요.

운동을 할 때, 아침을 준비할 때, 약간의 텐션이 필요할 때, 일렉을 좋아하신다면!  


Galantis_Satisfied (feat.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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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매거진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흔쾌히 반겨준 S와 JJ에게 고마움을 전해요. 고마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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