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ad I Met Pet, Take 3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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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ke Jordan "Glad I Met Pet, Take 3"
Flight to Denmark, 197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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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 수치는 모두 정상이에요.
그런데 여기 폐 오른쪽에 임파선 보이시죠, 이 부분이 비대해져 있는데 지난번과 비교했을 때 큰 변화는 없네요. 다음 검진 때 CT 촬영하고 음영 판독한 다음에 약을 더 늘릴지 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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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변화가 없다니. 매일 아침 염증에 가장 효용성이 높다는 스테로이드를 네 알씩 꼬박꼬박 처먹었는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오전 8시 이전에 일어나 약을 때려 넣었건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여전히 낯설기만 한 엑스레이 속 내 폐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사의 진단이 틀렸기를 잠깐 빌기도 했다. 하지만 뭐든 정확할 것만 같은 의사는 결과를 모르는 척 다시 물어보는 내 질문에 같은 답을 반복했다. 나아지지 않았다고. 이런 젠장.
속이 상했다. 혈액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반가움이 무색할 정도로. 나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뜀박질하며 새로운 피를 생산하는 혈관들이 무척 서운할 정도로. 스테로이드들이 혈액에만 가서 염증 수치를 낮춘 건가.
동생이 병원으로 데리러 오기 전, 병원 밖 약국에서 42일간의 약을 타기 위해 서둘렀다. 걷는 내내 머릿속에 엑스레이에 찍힌 폐를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왜 좋아지지 않았던 걸까. 첫 정기검진에는 아주 조금 좋아졌다고 했는데, 1월에 스트레스가 많아서였을까, 외출이 너무 잦았나, 일을 했기 때문인 걸까. 마음 같아선 임파선들을 부여잡고 물어보고 싶지만, 비대해진 임파선은 말을 할리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여 어느 쪽으로 가는지 확인조차 못하고 앞에 보이는 약국으로 직진했다. 처방전을 내고 한참 뒤에야 평소에 가던 약국이 아닌 걸 깨달았다. 바로 옆에 붙어 있던 다른 약국에 와서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거다.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조제실을 쳐다봤지만 이미 내 약은 내 손을 떠난 듯했다. 아, 나는 가람약국이 더 좋은데.
약봉지 텍스쳐도 달랐다. 저녁에 먹어야 하는 위장약을 담아주는 용기도 달랐다. 약 뭉치를 담아주는 방식도 달랐다. 한마디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같은 스테로이드겠지, 그래. 다음엔 다시 가람약국에 가면 되니까.
정기검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조급해하지 말라고, 염증이 혈액부터 수치를 낮추고 그다음에 임파선을 낫게 할 거라고. 먹는 스테로이드 양이 적으니, 그만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래도 혈액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다행 아니냐고. 맞아, 다 맞는 말이야. 틀린 말 하나 없지.
정기검진이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나는 불안했다.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어떡하지. 약을 늘리라면 어떡하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고 부질없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사람은 원래 그렇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물론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함이 엄습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지만,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긴 했다. 신기한 건, 오늘의 검진 결과에 대한 예상 시나리오는 없었다. 백지상태가 되었기에 오늘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2.
며칠 전 불안해하는 나에게 K는 자신이 읽던 책의 문구를 들려주었다.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어떤 사람은 발달장애나 질병의 습격을 받으면 겁에 질리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이로 인해 특정 궤도나 행동양식이 파괴되면 새로운 길과 방식을 만들어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를 수 있도록 신경계가 억지로 움직인다. 나는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이러한 질병의 이면을 접했으면 이 책에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화성의 인류학자, 올리버 색스)
사람들이 질병으로 좌절하고 낙오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쓰고 신경계가 억지로 움직여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룰 것이라고. 심증으로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통계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결과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 이성적인 존재였다면 올리버 색스의 말이 무척 솔깃했으며 기뻤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질병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상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문구를 듣자마자 떠올린 생각은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만약 ‘대부분의 환자’가 아닌 소수의 환자에 해당되면 어쩔 건가 그리고 ‘신경계를 억지로 움직’인다는 문구를 듣자마자 피곤해졌다. 왜냐하면 K는 반강제로 신경계를 움직이고 이것이 새로운 길이 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이라, 그게 뭔가. 과연 내가 만들 수 있을까. 불안감 때문인지 자신감도 떨어졌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내 마음을 피해 간다. 너무나 정직한 긍정의 언어들이 때로는 멀게만 느껴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K에게 솔직히 말했다. 새로운 길 못 만들면 어떻게 하냐고, 온갖 피해 갈 구실을 대며 어렵다고 투덜댔다. 몇 시간 뒤 K는 다정한 문자를 보냈다, ‘새로운 길’ 안 만들어도 된다고. 새로운 길을 만들지 않아도 나는 그냥 나라고.
청개구리 근성이 아직 남아있어서일까. 새로운 길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K에게, 가족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불안함에 허덕이고만 있을 존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질병과 살아가는 건 결국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만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끊임없는 지혜와 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안함에만 쌓여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도 싫었다. 그러기엔 너무 억울하다.
사실 그놈의 새로운 길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음 달 CT 촬영을 하러 갔을 때 지금과 같은 여전한 임파선을 보고 싶지 않다는 거다. 염증을 낮추고 면역력을 높이는데 뭘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R의 말처럼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겠지만(R 역시 비슷한 질환을 경험하고 있기에 무척 신뢰할만한 조언이다). 마침 S가 나에게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스쿼트 백 개씩 100일 함께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흔쾌히 수락했다. 왓 엘스 두 아이 루즈? 처음엔 스쿼트 백 개가 아득해 보였는데, 해보니 할만했다. S의 제안으로 이 과정을 타임랩스로 찍어 서로 공유하는데,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재미있다. 또한 알이 베긴 건지 잘 모를 허벅지의 딴딴함 역시 기분 좋은 보상이라면 보상이랄까.
평소에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를 했었는데, 질병과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기분 좋은 결과만을 바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새로운 길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며 첫 시작은 매우 소소하며 작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와 사소한 노력들이 무심코 하는 습관이 되어 일상을 단단히 잡아내어갈 때, 그때가 되어서야 고속도로처럼 시원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신경계가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왓 엘스 두 아이 루즈?
'안녕, 사르코이드'는 저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두달 전, 유욕종증(사르코이드증)을 확진 받고 약을 복용하는 중이에요. 너무나 생소한 병명 때문에 처음엔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요. 궁금하고 알고 싶어 포털 사이트도 검색해 보고, 유육종증을 경험하신 분들의 블로그도 찾아 보았어요. 많이 좋아졌다는 경험담을 읽으며 저의 일인 것처럼 기뻤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인생은 역시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사르코이드 덕분에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이 매거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이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기도 했고, 서로의 글에서 힘을 얻고 싶었어요. 이제 막 시작했기에, 그리고 들쭉날쭉한 마음이 어디로 갈지 잘 모르겠지만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나누어주실 경험과 순간이 있다면 반갑고 힘날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