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르코이드> '또' 작은 시리즈 - 첫 번째
2019년 8월에서 9월을 넘어가는 그 시기, 나는 ‘인생 춤’을 만났다. 살면서 후회란 것을 별로 하지 않는데, 땅을 치며 후회하고픈 순간이 많던 시기였다. 잠깐만, ‘땅을 치며 후회한다’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걸까. 분풀이의 대상이 땅이 되어서는 안 될 텐데. 여하튼 나는 삼십 대 중반이 된 몸을 원망했고, 왜 그제야 플라멩코를 알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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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태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정중앙 바로 앞에 있는 빈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라나다(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의 모든 플라멩코 공연을 섭렵하고 있는 안나가 미리 예약을 해 둔 덕분이었다. 레스토랑에는 이미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식사를 함께 하러 온 가족들도 보였고 연인이나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혼잡함을 헤치고 맨 앞에 비어 있는 테이블로 안내를 받는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충분했다. 안나는 한 번도 플라멩코 공연을 ‘경험’ 하지 않은 나에게 가장 앞쪽에 앉으라고 했다. 함께 온 루카스는 바로 뒤에 앉았는데, 내가 너무 앞에 앉아서 댄서의 스카프에 맞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농담을 건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 그냥 미소로 웃어넘겼다. 뭐, 그럴 것 까지 있나. 숙소를 함께 쓰는 사람들 중에서 안나와 루카스를 만났다. 둘 다 그라나다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라나다 특산 와인을 주문하고 따라오는 타파스를 즐기며 공연을 기다렸다.
“하늬, 네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야.”
“음, 그래?”
안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니. 뭘 상상해야 할지도 잘 몰라서 사실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았는데. 플라멩코 춤을 배우러 온 안나와 기타를 배우러 온 루카스는 서로 얼마나 플라멩코가 매력적인지 다투듯 얘기했다. 그 정도의 춤이란 말인가. 마침 공연을 알리는 소리에 우리의 대화는 잠잠해졌고 모두가 조용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내 몸은 정말 미친 듯이 쉬지 않고 반응했다. 짜릿짜릿하고 찌릿찌릿한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리를 휘감고 가슴으로 전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져 몇 번이고 숨을 붙잡았다. 댄서의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두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댄서가 턴을 할 때마다 그의 머리와 몸에 붙어 있던 땀방울들이 와르르 날아와 내 몸에 닿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땀방울들이 닿을 때마다 좀 놀라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불쾌하거나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매 순간 엄청난 힘을 발산하며 춤을 추는 댄서에 난 완전히 넋을 잃었다.
공연이 잠깐잠깐 멈추고 연주자들이 호흡을 가다듬을 때마다 뒤를 돌아 안나와 루카스를 번갈아 보며, 있는 힘껏 눈동자에 힘을 주고 크기를 키워 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WHAT IS IT!!!!!)”
“내가 말했잖아, 하늬! 말했잖아!!(I told you, Hanui. I TOLD YOU!!!!)”
도대체 이게 뭐냐며. 이런 춤이 어디 있냐고. 왜 나는 이걸 이제야 알게 된 거냐며. 플라멩코 공연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로움, 이상한 원망이 섞인 감정을 언어로 모두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모든 감정을 눈에 담아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안나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I told you’만 수없이 외쳤다. 때로는 확신에 차서 ‘너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어’의 뉘앙스의 아이 톨 쥬. 때로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웃음을 지으며 ‘이것 봐, 플라멩코가 이런 춤이라고 후후’의 뉘앙스를 담아 말했다.
그라나다에 도착해 처음으로 본 공연에는 세 명의 댄서와 기타 연주자, 칸테(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었다. 운 좋게도 꽤 멋진 댄서의 공연을 볼 수 있었고, 안나의 설명에 따르면 그 유명한 댄서는 집시라고 했다. 공연을 마치고 연주자들이 레스토랑의 조그마한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손님으로 온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무리에 너무 끼고 싶었다.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당신의 공연이 너무 환상적이었다고, 내 인생에서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너무나 멋졌다고 내 입을 통해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안나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안나는 땀방울을 나에게 흩뿌린 그 댄서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저 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당신 춤 넘나 짱짱이었어!!’를 눈으로 말하며 (그리고 전달되기를 바라며) 짧은 스페인어로 감사의 표현을 반복했다.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어나 처음 본 공연이 자꾸만 마음에 어른거려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한 플라멩코 수업을 떠올리며 평생을 플라멩코를 춰 온 댄서들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발끝이라도 따라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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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본 공연은 사진도 찍지 못했어요. 정말 정신없이 눈으로 저장하기 바빴거든요 ㅎㅎ
<안녕 사르코이드>에서 갑자기 플라멩코 이야기를 꺼냈어요. 생뚱맞지만 꼭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지난겨울에 춤을 추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거든요. 2019년 11월 30일, 조직검사를 비롯해 추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스페인행 비행기를 취소했습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다시 스페인 그라나다로 갈 예정이었어요. 플라멩코도 배우고요. 때마침 스페인에 살고 있는 친구 가족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함께 보내자며 숙소를 찾고 있었지요. 온갖 아쉬움이 묻어서인지, 스페인에서 춤을 추고 있어야 할 시간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억울해서였었는지, 지난여름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았습니다.
휴직하는 동안 몸이 좀 나아지면 몸을 움직이고 싶었어요. 반갑게도 제 친구가 스윙을 하고 있어서, 친구의 수업을 듣기로 했습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수업은 결국 한 차례 지연되더니 결국 취소가 되었어요. 충분히 납득할만한 결정이었습니다.
만약 아프지 않고 건강한 상태에서 휴식 기간을 가졌다면, 저는 춤을 배우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어느 골목에서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춤을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어서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뭔가 일상에서 설레는 그 무언가를 느끼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녕 사르코이드>의 작은 시리즈처럼 이 글을 써 보고자 합니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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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bo Valdes & Diego el Cigala "Inolvidable" (Blanco y Negro)
플라멩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저에게 루카스가 Bebo & Cigala (Blanco y Negro) 앨범 영상을 보여 주었어요. 분명 루카스는 El Cigala(정말 유명함)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저는 쿠바의 재즈 피아니스트 Bebo Valdes에 반해버렸어요. <안녕 사르코이드> 두 번째 글에서 소개한 "Tea for Two"를 연주하기도 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