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와 스테로이드, 그리고 폐
하늬, 어어 손이 예뻤구나. 손 예쁘다.
아아.
얼마 만에 듣는 말인가. ‘손이 예쁘다’라는 말. E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꽤 오랜만에 듣는 손에 대한 칭찬에 순간 내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해졌다. E는 그냥 보고 느낀 걸 말했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쑥스러웠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인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E는 얼마간 내 손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고 나는 혼자서 머릿속으로 답했다. ‘언니 그건 말이야. 아마 내 손톱 때문이었을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손톱이 많이 좋아졌어. 그래서 손이 덩달아 예쁘게 보였을 거야. 근데 기분 되게 좋다. 손이 예쁘다는 말 정말 오랜만이야, 정말.’ 손과 손톱에 대한 역사를 풀어놓는 대신 나는 E에게 수줍게 자랑했다. “아, 사실 내가 신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손이에요. 특히 손바닥” E가 칭찬했던 것은 손등 쪽이었는데 나는 손바닥이 좋다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자랑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달달한 커피가 채워주는 당도 높은 대화를 이어갔다. 손에 대한 나 혼자만의 속삭임을 제외하곤 E가 칭찬하면 나는 넙죽넙죽 다 받았다. 머리와 마음속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남은 것 없이 다 얘기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받으면 무언가를 주고 싶고 더 줄 것이 없나 자꾸만 생각을 뒤지게 하는 매력을 가진 사람, E. 그런 사람이 나를 배려하며 아픔에 대해 물었고 나는 거름망에 거르지 않고 얘기했다.
그랬다. 몇 달 전부터 손톱에 변화가 찾아왔다. 손톱만 하루에 몇 번을 쳐다본 적도 있다, 신기해서.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스테로이드가 손톱에까지 찾아가서 염증을 낫게 해 주었나? 아님 챙겨 먹은 음식과 영양제가 힘을 발휘하는 걸까?
2008년 채식을 시작하던 그즈음부터 손톱의 모양이 물결을 만들며 자랐다. 우둘투둘. 처음에는 엄지와 검지부터 그러더니 결국 중지까지 변했다. 매년 빠지는 체중과 변하지 않은 손톱, 2013년 이상하리만큼 힘들던 북한산 등산이 기점이 되어 근처 병원을 방문했고 2014년 채식을 중단했다. 중단하고 나서도 손톱은 변하지 않았다. 우둘투둘 거리며 자라고 잘려 나갔다. 채식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감지하지 못했던, 미처 챙기지 못했던 영양의 불균형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 나의 채식을 가장 걱정했던 – 손톱의 변화가 ‘고기를 먹지 않아서’라고 판단했다. 동생은 가끔 ‘손톱 검사’를 하면서 덧붙였다. ‘아, 누나 손 진짜 예뻤는데.’
매끄럽게 나기 시작한 손톱만이 아니었다. 유육종증 이후 일을 쉬면서 스테로이드 약을 복용하며 나의 몸에는 여러 변화가 찾아왔다. 스테로이드 장기 복용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대상포진을 경험했고 생리의 양이 급격히 줄고 주기가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생리통이 심해졌다. 또한 아주 작은 구레나룻 같은 것이 생겼다. 그걸 알아차린 어머니는 신기한 듯 계속 쳐다보셨다. 나는 몸에 털이 거의 없거나 가는 편인데 그래서 이런 변화가 무언가 재밌다. 안타깝게도 머리털은 이 변화의 흐름에서 제외다. 무척 애석한 지점인데, 빠지지 않으면 다행인 거다(약의 부작용 중 하나가 탈모다). 그리고 체중이 늘었다. 어떨 때는 붓기도 했다. 살이 찐 것과 부어 있는 것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 입맛이 돌아 살이 찐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일을 쉬면서 활동량이 줄고 스트레스를 덜 받아 그랬을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의 복합적인 결과이겠지. 나의 체중은 2012년 이전으로 돌아갔다, 일을 시작하기 전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인생 최고의 몸무게로 달려가서 이게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몇 년 동안 내리막길만 걷던 체중이 올라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몸에 비해 얼굴(볼)에 살이 많은 편이었는데 다시 체중의 증가가 쉽게 얼굴의 변화로 드러났다. 나를 오랫동안 보아왔던 가족들과 친구들은 반가워했고 최근에 나를 알게 된 이들은 조심스레 물었다. 스테로이드를 중단하게 되면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 또다시 살이 빠질까 두려운 게 오히려 지금의 진심인데,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한 마음을 잊지 않기로 매번 약속한다. 물론 작아져 입을 수 없는 바지들을 볼 때면 좀 난감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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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9일, 금요일. 정기검진이 있는 날, 평소와 같이 지하 2층에서 폐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당일 진료를 받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의 번호는 A4091. 어떻게 이 번호가 나에게 지정되는지 늘 궁금하다. 0001을 가진 사람도 있을까. 처음에는 내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어지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왜 내 존재가 숫자가 되어야 하는 거야.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큰 병원에 대한 괜한 반발심이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혹은 몇 번씩 병원을 가다 보면 아무도 모르는 숫자로 불리는 게 편하기도 했다. 당일 번호로 잠시 불리다 어느새 사라지는.
'4091번 님.' 간호사가 내 당일 번호를 불렀고 이름을 확인했다. 익숙한 간호사의 얼굴이 슬며시 반갑기까지 했고 그런 감정이 드는 게 조금 재밌었다. 의사는 작년 12월에 찍은 폐 엑스레이 사진과 당일에 찍은 사진을 비교해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여기 불룩 올라와 있는 게 염증인데요, 이 부분이 많이 없어진 게 보이시죠. 그리고 여기 대동맥 주변으로 염증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도 많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여기, 림프절로 감싸져 있는 곳도 염증이 있었는데 색이 많이 옅어졌어요. CT 촬영을 하지 않아서, 점들로 되어 있는 곳까지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엑스레이 촬영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들이 색으로 표시되는데 그런 게 없죠. 약 드신 지 6개월 정도 되었잖아요. 종료하겠습니다.
의사는 차트 기록에서 스테로이드 복용 시작 날과 마치는 날을 입력하며 이어 말했다. "복용량을 줄이는데 일주일 동안 두 알씩 드시고 다음부터는 한 알씩 일주일 드시면 됩니다. 3개월 뒤에 영상 촬영하고 검진할게요."
"감사합니다" 평소보다 마지막 인사에 힘주어 말하곤 정기검진 날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의자에 나왔다. ‘종료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의 음성이 윙윙 떠다녔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가슴과 갈비뼈 안 그 어디쯤에 있을 폐를 생각하며 두 손으로 감쌌다. 염증이 옅어진 부분들을 떠올리며 그동안 애썼을 폐에게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말했다. 폐의 위치 때문인지 폐를 감싸 안으면 나를 토닥이는 것처럼 몸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신기하고 좋았다.
여느 때처럼 처방전을 받아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매번 다른 약국을 간다. 그냥 경험의 차원에서 다른 곳으로 간다. 이번에는 조금 더 걸어 병원과 떨어진 작은 약국으로 갔다. 큰 약국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텐데, 마치 약을 주는 공장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정말 많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편리한 동선을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일 거다. 늘 놀랍다.
"최하늬 님-"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걸었다. 스테로이드에 대한 짧은 설명이 담긴 쪽지와 함께 약을 주셨다. 가벼운 약봉지에 흠칫 놀랐다. 약국마다 약을 담아주는 형태가 조금씩 다른데 어떤 곳은 하루에 먹을 분량을 소분해 하나씩 넣어준다. 그러면 수북한 약봉지에 마음이 씁쓸해지면서 빈 봉지들을 매일 버려야 함에 괜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결국 다 쓰레기니까. 어떤 약국은 스테로이드 한 달 분량(140정)을 일주일 씩 나누어 투명한 봉투에 담아 주신다. 그럴 경우, 내가 소분해서 관리해야 하는데 한 알이라도 흘릴까 봐 안절부절이다. 친구네 집에서 잠이라도 자게 되면 무조건 약봉지는 챙겨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14와 7이라는 단출한 숫자가 쓰인 봉지를 각각 받았다. 기분이 오묘하게 가벼워지고 저릿했다. 저게 다야?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건강하세요”라고 말씀하시며 약을 건네셨다. 약국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백번은 넘게 했을 보통의 말이지만 오늘의 나에겐 특별했다.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했다. 아마도 백번은 넘게 들었을 의례적인 인사말이었겠지만 조금의 애정이 묻어있길 바라며.
여러 몸의 변화들을 발견하며 경험하며 지난 6개월을 보냈고 ‘종료하겠다’는 알림을 받았다. 폐를 비롯해 여러 장기들로 퍼져있는 염증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약을 중단하고 적극적으로 관찰(정기검진) 해도 좋겠다는 의사의 판단이었다. 스테로이드가 없으면 다시 염증이 자라날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계속 검진을 받을 테니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거다. 사실 이렇게 감사한 변화를 금요일 당일에는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갑상선 수술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채 마음이 복잡해져 신경이 온통 갑상선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폐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칭찬받아 마땅한 변화를 좀 누려야겠다. 그동안 고생했을 폐를 위해 신선한 공기라도 좀 쐬러 가야겠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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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ie Lunceford and His Orchestra "Rhythm is Our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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