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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May 19. 2020

춤추는 할머니가 된다는 건 꽤 멋진 일이야

<안녕 사르코이드> '또' 작은 시리즈 - 두 번째 

처음엔 삼십 대의 내 몸을 원망했다. 우습게도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 생각이 바뀌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플라멩코 수업에서 함께 스텝을 밟는 사람들과 공연을 보러 다니는 친구들 덕분이었다. 나처럼 플라멩코도 그라나다도 처음인 사람도 많았다. 여름휴가를 좀 더 특별하게 보내고 싶거나 색다른 배움을 위해서였다. 어떤 이들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년 그라나다를 찾았다. 처음에는 그라나다가 좋아서, 플라멩코가 좋아서였단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서 친구를 만들게 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점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단다. 물론 도시 그 자체에 매료된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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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플라멩코 공연 메이트인 안나는 영화 관련된 일을 하면서 매년 그라나다로 플라멩코를 즐기러 온다. 루카스는 10년째 기타를 배우러 그라나다로 오는데, 이미 성인이 된 두 아들이 있다. 둘 다 내 친구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다. 철새가 멀리 떠났다가 때가 되면 고향에 돌아오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그라나다를 찾았다.            


하늬, 오늘 공연은 내 친구 재플린도 함께 볼 거야. 소개해줄게, 정말 멋진 사람이거든. 

그리고 오늘 밤 공연 역시 무척 멋질 거야. 진짜 플라멩코를 보게 될 거야. 

    

오늘의 공연이 열리는 곳은, eshavira(에샤비하). 십 년 전, 루카스는 그곳에서 안 좋은 추억이 있다며 절대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축축하고 컴컴한 것도 싫고 공연은 제 시각에 시작된 적도 없다고 투덜댔다. 더욱이 십 년 전 그날, 어쩌고 보니 자기가 그 바에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술을 사고 있었단다. 꽤 억울했는지 루카스는 그 얘기만 두세 번을 더 했다. 십 년이 지나도 어떤 감정은 생생하게 마음에 남아있나 보다. 

     

다른 공연장을 택한 루카스를 토닥이며, 안나와 나는 알바이신(관광지구, 숙소가 있는 곳)에서 시내로 내려갔다. 마치 미로와도 같은 꼬불거리는 골목을 따라 지그재그로 쉴 새 없이 내려가다 보면, 마라케시의 야시장을 연상케 하는 형형색색의 조명과 가게들, 아랍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게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거리의 가게들을 모두 눈에 담는 게 목표인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두 눈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보따리장수처럼 한 바가지 쇼핑을 하고 말 테다! 큰 결심을 하며 골목을 지나쳤지만 결국 그 골목에서 구매한 거라곤 귀걸이 2개 정도뿐이었다. 하하.     

  

골목을 살짝 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대적으로 정돈된 큰 길이 중심가를 가로질러 펼쳐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타파스 바와 타블로(플라멩코 공연장)들이 즐비한 골목이 나왔다. 혼자 찾아가라고 하면 아마 불가능할 거다. 난, 안나의 빨간 샌들만 쫓아 내려갔으니까.    

  

재플린을 처음 만난 곳은, 에샤비하에 가기 전 들린 타파스 바에서였다. 긴 머리에 화려한 펌을 한 그는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말랐지만 탄탄한 몸이 드러났고, 에메랄드빛 아이섀도가 인상적이었다. 말할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왕성한 손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 역시 그라나다에 온 지 십 년쯤 되었단다. 미국에 가족이 있지만 그라나다에 자주 온다고, 한번 오면 오래 머문다고 했다. 지금은 이곳에 파트너도 있다는 것 같았다.      


안나는 화이트 와인, 나와 재플린은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곤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먼저 타파스 바에 있던 네덜란드에서 온 기도도 자연스레 함께했다. 기도는 플라멩코 기타를 배우러 그라나다에 4, 5년 전부터 왔단다. 하는 일을 은퇴하고 나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한 거라고 했다. 오늘 에샤비하에 들린 것도 꽤 유명한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에샤비하'로 들어가는 문에 붙어 있던 또 다른 공연 일정 :) 


에샤비하의 공연은 밤 11시에 시작한다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 11시에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슬금슬금 모여든 연주자들이 무대 옆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각자의 악기를 튜닝하거나, 연주를 맞추어 보는 것에 열중했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 역시 왜 공연이 시작하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11시에 전에 열린 바에 가서 음료를 주문했다. 이곳의 입장료는 음료를 포함해 5유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대한 곳에는 관대한 사람들이 오기 마련인가.       


안나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에샤비하는 ‘자유로움’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날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연주하기로 한 메인 연주자는 있으나, 연주는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온 친구들, 그가 소개하고 싶은 친구들과의 즉흥 연주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려야만 했다. 에샤비하의 공연이 늦게 시작하는 이유도, 직업 연주자들이 각기 다른 바에서 공연을 한차례 마치고 이곳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적은 입장료의 일부는 그날의 연주자에게 돌아가지만, 연주자들의 친구들은 비용을 받지 않는다. 우정으로, 애정으로, 혹은 연주가 하고 싶어서, 연주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은 그날의 운에 공연을 맡겨야 한다.     

 

에샤비하가 이렇게 사람들의 애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몇십 년째 꿋꿋이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 사장님이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맥주를 따르며 한 명 한 명을 환대했는데 그 웃음이 무척 편안했다.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에샤비하의 자유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낮은 입장료를 유지했단다. 몇 년 동안 사장님이 몸이 아팠을 때는 문을 닫기도 했었는데, 에샤비하가 계속 연주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응원한 덕에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단다. 바에서 음료를 따르던 할아버지 사장님은 연주의 지연을 사과하며, 연주의 시작을 알리고자 무대에 올랐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이렇게 사장을 환대하는 곳이 있던가. 순간, 뭉근한 공기가 에샤비하를 채웠다.   

 

(왼) 메인 연주자 (중간) 연주에 초대된 연주자 :)   


연주는 기타 연주자 한 명으로 시작해, 결국 다섯 명이 넘는 사람들의 합주로 뻗어 나갔다. 다른 기타 연주자와 혹은 카혼 연주자와의 합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일정한 박자에 변화의 기교를 자연스레 펼치는 연주는 마치 재즈의 무엇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꽤 유명한 기타 연주자와 합주를 희망하는 연주자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훌륭한 칸테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선물 받았다. 안나가 귓속말로 말해 주었다. 진짜 유명한 가수라고. 그리곤 살짝 눈을 찡긋했다. ‘내가 말했지, 하늬. 이게 플라멩코야’.      


기타를 배우러 온 기도는 기타 연주자들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쉼 없이 따라 움직였다. 춤을 배우러 온 안나는 아주 조용히, 두 손으로 박수를 치며 박자를 따라갔다. 박자와 함께 안나의 정돈되지 않은 단발이 리듬에 따라 찰랑거렸다. 우연히 그라나다에서 아들의 친구를 만난 재플린은, 플라멩코 공연이 처음인 그에게 공연을 틈틈이 설명해 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는 새벽 1시가 넘어가도록 뭉근한 공기를 마시며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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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샤비하의 공연을 모두 보고 들뜬 마음으로 다시 숙소로 올라가는 골목에서 안나는 물었다.      


하늬, 재플린 몇 살 같아 보여? 

음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왜?

재플린 올해로 아마 70살 일거야. 근데 그렇게 안보이지 않아? 정말 대단해. 건강한 에너지가 부러워!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포개어지는 시기에 찾아간 그라나다에는, 나처럼 단기로 온 사람보다 장기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와 비슷한 연령대보다 더 높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났다. 진심으로 멋져 보였다. 일정 기간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부럽기도 했지만,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한 곳을 오랜 기간 찾는다는 걸 기억하고 싶었다. 그들의 삶에 비추어 나의 40대, 50대, 혹은 70대를 잠시 상상해 보았다. 매년 그라나다를 찾는 호사를 누릴 수는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꼬불꼬불한 골목을 내 집처럼 훤히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좋아하는 타파스 바 다섯 군데 이상은 섭렵하기를 기대하며(그때가 되면 술을 꼭 마실 수 있게 되기를), 스페인어 실력도 나아졌기를 꿈꿔본다. 그리고 여전히 춤을 배우기를, 누군가의 눈을 보며 박자를 맞추는 나를 상상해 본다. 춤추는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정말.      



글과 함께 소개하는 영상 

eshavira의 공연 중 일부를 담은 영상이에요. 메인 연주자(가장 오른쪽)를 제외하곤, 모두 깜짝 게스트였어요. 공연이 좋을 때 관객들은 '올레'라고 외치는데요, 분위기에 따라 크게 또는 작게 소리 냅니다 :) 

기타 연주로 시작된 공연은 카혼과 칸테의 어울림으로 더 농후해진다. 


<안녕 사르코이드> 작은 시리즈_첫 번째 글이 읽고 싶으시다면, 아래 제목을 클릭해 주세요 :) 

어느 골목에서 난 춤을 추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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