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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Jul 19. 2020

‘여름’과 ‘와인’이 만나 특별해지는 곳, 그라나다

<안녕 사르코이드> '또'  작은 시리즈 - 마지막

와, 이거 뭐야?

이건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야.

뜻이 뭔데?

여름의 와인(wine of summer)이란 뜻이지.  

오, 여름의 와인이라니. 이름 예쁘다!    

   

‘여름’과 ‘와인’이 이렇게나 잘 어울렸던가. 2.5 유로의 붉은색 음료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강렬한 햇볕이 광장의 돌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그런 날이었다. 루카스는 동네 한 바퀴를 구경시켜 주더니 광장의 작은 바에서 그라나다의 특별한 음료를 마셔보라며 권했다. 그라나다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달고 시원하면서도 톡 쏘는 청량함을 간직한 첫맛에 그만 홀딱 반했다. 와아, 도대체 이 음료는 무엇인가. 루카스는 여름의 와인이라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과 ‘와인’이 만나 이토록 달콤한 맛을 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띤또 데 베라노의 팬이 되었다. 한낮의 뜨거움이 식어질 즈음부터 마셨다. 다시 말해, 오후부터는 기분 좋은 알싸함에 취해있었다는 말이다.      


여름의 와인이라는 화사한 이름과는 다르게 띤또 데 베라노는 굉장히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음료이다. 저렴한 레드와인과 달달한 탄산수를 적절하게 조합한 다음 청량함을 더해줄 레몬 슬라이스를 떨어뜨리고 시원함을 높여줄 얼음을 몇 조각 넣으면 세상 부럽지 않은 맛이 탄생한다. 여기에 무더운 날씨는 맛의 풍미를 한층 더 높여준다.       


나는 더위와 목마름의 끝에 찾은 여름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갑고 달콤한 음료는 낯선 동네에 대한 경직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이제야 한숨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맛있는데 양이 적어 아쉬워하는 나를 보더니 루카스는 동네 슈퍼로 가서 구매할 수 있는 띤또 데 베라노를 보여주었다. 1.5리터짜리 페트병에 담긴 모습이 꼭 콜라와 비슷한데 여러 브랜드 중 가장 맛있는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양손 가득 띤또 데 베라노를 담아 숙소로 향했다. 이 음료에 한참 빠져 있었을 때는 어떻게든 한국에 가져가고 싶었지만 짐 안에서 터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아찔해질게 분명했다. 서로를 위해 참기로 했다.   

   

그는 여기서 샹그리아를 마시는 사람들은 멋모르는 관광객이라며 약간 빈정대듯 말했는데 뭐 그건 취향 차이일 뿐이었다. 나는 샹그리아보다 좀 더 저렴한 데다 개인적으로 맛도 더 좋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 알코올음료를 알게 되어 기뻤다. 그저 짧게 머무는 사람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동네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스페인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음료 정도는 무리 없이 스페인어로 주문할 때가 되는 순간, 그라나다는 나의 도시가 되었다.    


플라멩코를 배우기 위해 머물렀던 숙소가 있던 알바이신 지구는 관광지 중에서도 관광지다. 낮에는 관광객들이 구불구불하고 좁디좁은 길을 삼삼오오 모여 걸어 다니며 동네를 구경했고 밤에는 플라멩코 공연장이 즐비한 유명한 골목이 있는 곳이다. 관광지에 있으면서 현지인이 되었다는 착각이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단순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그저 그것으로 나의 하루가 충만했다.    


숙소에서 플라멩코 학원으로 가는 골목. 그라나다는 산에 둘러싸여 있어 날씨의 변화가 크다.

   

아침 8시 즈음 일어나면 가장 먼저 나무로 된 창문을 열어 해와 바람을 들였다. 부엌에서 모카포트로 끓인 진한 커피를 내리고 과일을 잘게 썰어 요거트에 넣어 먹으며 먼저 일어난 친구들과 소소한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바삐 나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늑장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9시가 조금 넘으면 숙소 근처 작은 광장에서 열리는 장으로 향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에만 열리는 장에는 신선하면서도 저렴한 채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점심과 저녁에 곁들여 먹을 양파나 가지, 마늘, 토마토 등을 한 바구니 사더라도 1유로 채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설프게 스페인어로 숫자를 세거나 그것도 어렵다 싶으면 주인아주머니께 손바닥을 펼치고 동전을 보였다. 그럼 아주머니가 채소 값만큼 동전을 가져가고 거스름돈을 주셨다. 애매한 값이면 거스름돈 대신 작은 버섯이나 양파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 주셨다. 몇 번 가다 보니 좋아하는 곳이 생겨 괜히 주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혹 나를 알아보시지는 않을까. 알아보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뭔가 득템을 한 기분으로 장을 보고 다시 숙소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내 일과가 시작된다. 친구가 물어다 준 번역 알바를 하고 열두 시가 되기 전 서둘러 플라멩코 학원으로 연습을 하러 갔다.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미리 녹화해둔 영상을 함께 보며 동작을 확인하고 서로의 동작을 봐주었다. 숙소와 학원이 걸어서 약 십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미로와도 같은 길이 금방 익숙해졌다. 오후 세시가 되면 초급반의 수업이 시작되는데, 에어컨도 소용없이 땀 냄새로 범벅이 된 곳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근사해 보였다. 학원 내에서 굉장히 사랑받는 초급반 선생님 필라는 칭찬쟁이였는데,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강렬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칭찬이라도 한마디 하면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좋았다. 우리의 몸동작들은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와 같았을 텐데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숙소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닫혀있던 창문을 열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의자를 끌어다 작은 테라스에 앉아 얼음 하나를 띄운 띤또 데 베라노를 마셨다. 기가 막힌 맛이었다. 두 잔 정도 마시면 살짝 알코올이 올라온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이 한둘 돌아오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다, 기분 좋은 저녁이.

   

나는 주로 안나와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향했다. 때로는 다른 친구들도 함께 했는데, 그라나다에는 공연장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각자가 좋아하는 공연을 찾아갔다. 매일 봐도 매 순간이 신기했고 짜릿했다. 밤의 많은 시간은 공연이 끝난 뒤 바에서였다. 와인이나 맥주를 주문하며 타파스도 곁들이며 함께 본 공연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루카스는 역시 띤또 데 베라노다. 이쯤 되면 루카스가 고집쟁이가 아닌가 싶다.    

  

공연이 끝나면 취기도 떨칠 겸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면 장대한 알함브라 궁전이 한눈에 보인다. 색색의 빛이 발하는 궁전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궁전을 매일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어쩐지 아득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숙소로 올라가다 잠시 멈추어 바라본 알함브라의 궁전. 필름 카메라로 기대 없이 찍었는데, 나름 잘 나온 것 같아 뿌듯해요 :)


매일 아침 일어나 장을 보거나 또는 광장 옆에 위치해 있는 작은 바에서 커피와 토스트를 먹었다. 소박한 산책을 하고 새로운 베이커리에서 다양한 빵을 먹어보기도 하고 그냥 구경하기도 했다.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도 하고 공연을 보기도 했다. 가끔 수업을 마치고 광장에 있는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아는 얼굴 한둘은 꼭 지나갔다. '올라'하고 부르면 뒤돌아 보았던 사람들.

   

내가 사는 서울에 비해 그라나다는 작은 도시였다. 우체국도, 슈퍼도, 레스토랑도, 베이커리도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소하지만 반짝이는 일상을 짧게나마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느끼는 경이로움을 그곳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채워지지 않은 바람이 늘 마음을 스쳤다. 다시 올 거라고 그때는 조금 더 길게 머물 거라고 그래서 그라나다 방언이 잔뜩 묻은 스페인어를 구사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만약 띤또 데 베라노를 만들어 드시고 싶다면!

사이다와 레드와인을 6:4 정도의 비율로 섞고, 레몬 조각과 얼음을 넣어 줍니다. 풍미를 조금 더 살리기 위해서는 레몬즙을 취향에 따라 넣어 주는 것도 추천해요. 물론 이 비율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 레몬이 없으면 오렌지나 귤도 가능합니다. 친구와 얼린 귤을 갈아 넣어 마셨는데 굉장히 맛있더라고요! 뜨거운 여름날 드셔 보시길 권합니다. 왜 '여름의 와인'인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안녕 사르코이드>의 '또' 작은 시리즈의 마지막 글입니다. 플라멩코에 대해 더 소개하고 싶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러다 보면 작은 시리즈가 끝날 것 같지 않더라고요. 띤또 데 베라노와 그라나다에 대한 그리움을 담는 것으로 마칠까 합니다.


그라나다는 2019년 8월 말과 9월 초 약 2주 정도 머물렀던 곳이고, 플라멩코를 배우기 위해 다녀왔어요. 경제적으로 좀 무리되는 선택이었지만 그때의 저에겐 꼭 필요한 여행이었어요. 결국 기대하지 않았던 플라멩코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소중한 시간이 되었고요. 2019년 12월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아픈 몸을 알아차리고 모든 여정을 취소한 아쉬운 마음이 들어 몇몇 기억을 꺼내 보았습니다.


코로나 19로 언제 그라나다를 여행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여전히 술과 이별한 제가 언제 띤또 데 베라노를 마실 수 있을지도요. 여러모로 그리운 시공간입니다 저에겐.


'또' 작은 시리즈를 더 읽고 싶으시다면,

첫번째 - 어느 골목에서 난 춤을 추고 있겠지 

두번째 - 춤추는 할머니가 된다는 건 꽤 멋진 일이야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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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lend Oye _ "La Prima Estate" (첫 번째 여름)

스페인이 아닌 이탈리아가 배경이 되긴 하지만, 여름을 그려보기 좋은 음악이라 소개합니다!

* 모바일 상에서 동영상이 재생되지 않으면 이 링크로 접속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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