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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Jul 29. 2020

당신이라는 알파벳 / 01  

JJ와 T, 그리고 B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술과 이별했다. 그래서 술을 마실 수 없는 설움이나 아쉬움, 안타까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성심성의껏 말이다. JJ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자 소중한 알코올 파트너다. 그와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 알코올 시너지가 엄청난 밀도와 속도를 자랑하며 상승한다. 물 2리터는 그렇게 마시기 어려운데 맥주 2리터는 어찌나 쉽게 넘어가던지. 알다가도 모를 마법과 같은 순간에 늘 그가 빠지지 않았다. 브랜드가 제각각인 맥주를 음미하며 서로의 취향을 찾아가기도 하고 맛있는 맥주라도 발견하면 함께 마실 생각에 무척 설렜다.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라면 마실 때마다 소환되는 술과 관련된 추억이라는 게 한두 가지씩 있을 거다. 부끄러워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순간이거나 눈물 나게 그립거나 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은, 하지만 그때니까 가능했을 법한 순간들 말이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나와 JJ가 와인을 더 마시겠다며 파자마에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집 근처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러 나갔던 새벽이 있다. 꽤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에 우리는 H가 쿨하게 건넨 카드를 들고 나왔다. 어두운 밤 스탠드 노란 조명에 의지해 맥주와 와인을 들이붓던 탓에 입술이 퍼레진 것도 모르고 배시시 웃음을 쪼개며. 와인 두병을 더 샀던가, 잠든 친구들 옆에서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고민과 생각을 나누며 우리는 여전히 깜깜한 새벽을 함께 보냈다. 내가 망원동 근처 원룸에서 살 때였고 모두 싱글일 때였다. 방인지 집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좁디좁은 곳에서 내 삶의 동반자들과 함께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생일을 축하하기 모인 밤이었다. 명랑하게 편의점 주인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니, 누군가가 우리의 보랏빛 입술을 가리키며 박장대소했다. 그때서야 서로의 몰골을 확인하며 어찌나 깔깔대며 웃었던지.           


-

“... 나 할 말 있어.”

“너 임신했구나?! 그치?!”

“... 응.”

“우와, 너무 축하해!!! 잘됐다!!”      


아직도 기억한다. 한 겨울이었고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와 S, JJ는 종로의 한 샤브샤브 집에서 만났다. 뜨겁게 달궈지는 샤브샤브 육수에 연기가 모락모락 차오르는 뜨끈한 오후였다. 어느 정도 익었다 싶어 고기와 채소를 건져 먹는데, JJ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7주인가 8주쯤 정도로 아직 임신 초기였을 때의 일이다. 나와 S는 진심을 다해 축하했다. JJ의 기분은 어떤지 짝꿍 T는 또 어떤지 여러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JJ를 살폈다. 임신과 육아는 새로운 세계일 테고 그 세계를 여행하는 데에는 또 다른 차원의 노동과 경제적인 부담이 증가한다. 예측할 수 없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겪으며 그 세계로 진입할 그를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걱정되었다. 나 역시 가보지 않은 세계라 보탤 말은 적었지만 뭔가 복잡했다. 나도, S도 그리고 JJ도.      


임신을 한 몸과 질병을 가진 몸이 보이는 증상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혹여 JJ가 알면 기분 상하지 않을까 섣불리 꺼내지 못했지만 그가 “임신하게 되면 몸에 드러나는 증상이 질병 같아”라고 말했을 때 나와 그가 경험하고 있는 몸의 변화와 그 변화를 마주해야 하는 마음이 어느 지점에서 교차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의 몸에서는 소중한 생명이 자라고 있지만 그로 인해 예측하지 못했던 몸의 변화를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몸이 무거워지고 피부가 건조해지거나 조금이라도 서 있으면 발이 퉁퉁 붓고 바로 누워 잠을 자기도 어려웠다. 호르몬의 변화로 인한 감정의 파동을 내가 모두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 역시 JJ의 몫이었다(물론 T도 함께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르코이드로 인해 일을 중단했던 시기와 JJ가 임신을 하면서 일을 중단하기로 결심한 시기가 비슷했다. 그리고 우린 서로 다른 이유로 정기검진을 하러 병원을 다녔다. 나의 경우, 나보다 나의 질환이 우선되는 병원 진료가 안심되면서도 어딘가 모를 씁쓸함이 동반되었다. 폐의 염증이 줄어들었는지 확인하는 절차는 가장 궁금한 증상이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알아야 할 필수 정보이긴 했지만, 그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 또는 스테로이드 장기 복용으로 일어나는 증상과 이에 따른 마음의 변화를 편히 얘기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너무 자잘한 것 같아서 말하기 민망할 때도 있고 이런 것쯤은 그냥 넘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스스로 입을 다물 때도 있었다. JJ의 경우, 모든 부분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아 중심의 진료가 행해지면서 산모의 안녕은 부차적인 것처럼 진료를 받을 때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태아의 안전과 무사함이 가장 염려되는 것이면서도 임신으로 인해 겪어야만 하는 몸의 변화가 불편할 텐데 이런 수고가 충분히 이해받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책을 찾았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책에서 위로와 공감을 받으며 지혜와 힘을 얻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JJ는 임신한 분들이 꽤 많이 가입해 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유용한 정보들을 찾고 습득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사르코이드가 희귀 질환이라 여전히 정보는 많지 않았고 부러 찾지 않은 것도 있었다. 대신 불안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동네 1차 병원을 찾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픈 사람들의 다른 삶을 들여다보는 게 궁금하면서도 부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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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JJ는 B를 출산했다(JJ와 T는 태명을 B로 했다). 예정일보다 늦긴 했지만 사진으로 본 B는 건강해 보였다. 전화기 넘어 들리는 JJ의 목소리는 조금 피곤한 듯했지만 그래도 내 친구 JJ였다. 그만의 쾌활한 톤으로 그동안의 소식을 전했다. 현재 JJ는 산후조리원에서 몸을 챙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외부인 간병이나 출입이 엄격해져 많은 시간이 혼자라고 했다. 공동공간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니 이해가 되면서도 어딘가 좀 속상하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지 않기를, 평안한 순간이 많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JJ와 나는 여전히 술과 이별 중이다. 몇 번 무알콜 맥주를 마셔보기도 했지만 우리 둘 다 금세 흥미를 잃었다. ‘유’ 알코올이 주는 목 넘김의 짜릿함과 텁텁하면서도 톡 쏘는 맛을 쓸데없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너무 속상했을 거다. 알코올이 필요한 순간 무알콜은 매우 적절한 대체제가 되어주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 JJ와 내가 만드는 알코올 시너지가 무한 상승하는 날을 기다린다. 그때는 지금의 아쉬움과 속상함, 어딘가 모를 우울함 툴툴 털어버리고 가벼운 안주삼아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듬으면서 그리고 힘이 되어 주면서.   




'안녕 사르코이드' 매거진을 이제 곧 매듭지으려 합니다. 닫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말, 제 글에 등장해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과의 장면을 꺼내어 보고자 해요. 이 매거진의 마지막 시리즈가 되겠어요. 짧지만 길었던, 그리고 지금도 끝나지 않는 이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던 사람들께 고마움을 담아 전합니다. 알파벳에 기대어.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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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같이 걸을까"

JJ가 좋아하는 이적님의 노래 중 같이 듣고 싶은 곡으로 선곡해 보았어요. 덕분에 저도 처음으로 들어보네요!


* 이 링크에서 노래를 감상하실 수 있어요(모바일에서 가끔 영상이 틀어지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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